본문 바로가기

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21

 

***

 

 

 

'연지야!..'

 

무너지듯 그자리에 주저앉은 정인은 입술을 깨물어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면서도 연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떼는순간 연지의 모습이 사라지기라도 할것처럼..

 

끔찍했지만.. 눈앞의 광경도 지금 처한 상황도.. 모두.. 하지만 마음을 다스릴 여유가 정인에겐 없었다.

그가 그토록 가슴아파하며 애타게 찾아헤메던 동생.. 그 어리고 여린 아이의 모습이 이토록 처참하게 망가져버렸다는걸 알게 된다면

그는 또 얼마나 아파하게 될지.. 보지않아도 알수 있었기에..

 

태연이 느끼고 있을.. 그리고 또 느끼게 될 아픔과 괴로움 따위가 고스란히 정인의 가슴을 짓누른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쉴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낸 정인은 일어설 기운조차 남지않은 몸을 움직였다.

먹은것도 없이 오기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뚱이는 이제 더는 정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나보다..

아픔과 두려움에 주체하기 어려울만큼 온 몸이 떨려왔고, 무겁게 주저앉아버린 다리도 말을 듣지 않는다.

정인은 일어서기를 포기한채 바닥을 기어 연지에게 가려했다.

 

"그러지 않는게 좋을겁니다. 지금 저 꼬맹이한텐 당신도 한끼 식사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알아야죠"

 

남자의 목소리따위 들리지 않는듯 정인은 조금이라도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계속 몸을 움직였다.

 

괴기스러운 연지의 모습이나, 겁주는 말에도 조금도 겁먹지 않는 정인의 모습에 방금까지도 재밌는 구경거리를 만난듯 싱글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굳어진다.

 

"잡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기다리고 있던 덩치큰 남자 둘이 재빨리 다가와 정인의 양쪽 팔을 잡아 일으킨다.

 

"놔! 이거 놔! 놓으라고! 연지야! 연지야!"

 

저 가여운 아이를 품에 안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오빠가.. 오빠가 널 찾고 있다고..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다고..

남자들에게 잡혀버린 정인은 발악하듯 온 힘을 짜내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정인의 외침에 연지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는가 싶었지만, 이내 한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으려는듯 이제는 죽어버린것 같은 여자의 목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제발.. 연지야.."

 

잡힌 팔을 빼내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리치던 정인의 목소리는 흐느낌이 되어버렸다.

엉망이된 얼굴로 연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정인은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땐 며칠새 익숙해져버린 삭막한 방안 이었다.

누운채로 멍하니 회색천장을 바라보던 정인의 눈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은 지치지도 않는군"

 

비꼬는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정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의자에서 일어서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시선이 비어가는 링거팩에 머무는가 싶더니 다음순간 정인의 팔에 꼽힌 바늘을 거칠게 뽑아버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멍하니 피가 흐르는 팔을 내려다보던 정인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본다..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마! 내가 곱게 대해주니까 네년이 뭐라도 되는거 같아?"

 

"알아듣게 얘기해"

 

"꼬맹이 저녁식사로나 주자고 애써 널 데려다 둔줄 알아?! 오냐오냐 해주니까 내가 우스운가본데. 다시한번 내 말을 무시했다간 각오해.

 조각조각난 지 동생 시체 찾으러 다니는 민태연을 보게 해줄테니까. 알아들었어?"

 

고개를 돌린채 입술을 깨무는 정인의 모습에 남자는 우악스럽게 정인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추게 한다.

 

"알아들었냐고 물었어"

 

정인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대답에 만족한듯 잡았던 정인의 턱을 놓고, 손끝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씩 웃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지만, 정인은 남자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 끝날거야. 그러니까 시키는대로만 해. 알았지?"

 

소름끼치는 미소를 끝으로 남자는 돌아섰다. 그가 막 문앞에 다다랐을때 조심스런 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지를... "

 

정인은 남자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나머지 말을 했다..

 

"연지를 .. 살려줄 생각이.. 있기는해?"

 

남자는 우스운 얘기를 들은듯 피식거리며 웃음을 참다가, 이내 큰소리로 웃어젖힌다.

정인은 주먹을 꼭 쥔채 남자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하아~ 하하하.. 역시 당신은 달라. 민태연이 왜 당신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것도 같단말야. 하하하하 하아....

아, 웃어서 미안. 그치만 재밌잖아. 자기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그 꼬맹이 목숨을 먼저 걱정하다니 말야.

혹시,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을거라는 믿음이라도 있는거야?"

 

이제.. 정인에게 중요한건 제 목숨 뿐만이 아니었다.. 연지가 아직 살아있다는걸 확인한 이상, 이 남자를 섣불리 건드려서 연지를

위험하게 만드는일은 없어야 했다.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침대시트을 말아쥔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런거.. 아니야.. 다만 나는.. 당신이 그앨.. 연지를 살려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건지 알고싶어. 정말.. 그앨.. 살려줄 수도 있는거야?..

 아니, 기회.. 살수 있는 기회는 줄 수 있는거잖아. 안그래?"

 

점점 다급해지는 마음에 애원하듯 매달리는 정인과는 다르게 남자의 표정 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느긋하기 그지없다.

마치 배부른 맹수가 먹잇감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 느긋하게.. 조금씩.. 정인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아, 미안하지만 말야. 그건 내 소관이 아닌거 같은데 어쩌지? 그건 민태연한테 말해야 할텐데.. 저런~ 지금 만날 수가 없지? 큭"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안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은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대체 눈앞에서 차갑게 웃고 있는 이 남자는

그에게 무슨짓을 하려는걸까.. 그에게 또 어떤 고통을 안겨주려는걸까..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저 느믈거리는 얼굴을 짓밟아주고 싶지만..

지금의 정인으로선 놈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것으로 조금이라도 더 연지의 안전을 확보하는것 외에 할 수 있는건 없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거지?.. 대체.. 왜 그사람을 괴롭히는거야.. 왜.. 그래서 얻는게 뭔데.. "

 

이해할 수 없는 놈의 말.. 아무 잘못 없이 괴물처럼 변해버린 연지의 모습.. 또다시 태연을 힘들게 할 무엇..

목구멍을 타고 뜨끈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소리조차 마음껏 지를 수 없는 지금 분노는 흐느낌이 되어 입안을 맴돈다.

 

 

"말 했을텐데? 다시 말해줘야 하나? 민태연은 무너져야해. 진짜 자기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

 

"아니! 그렇지 않아. 민검사님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하지마! 그게 그사람의 진짜 모습이야. 말도 안되는 운명앞에 편하게 무너지지 않는게

그게 그사람 진짜 모습이야! 네가 뭔데.. 너 따위가 뭘 알아!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어째서.. "

 

목안에 가둬두었던 분노가 입밖으로 터져나오고 만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의 입에서 지금껏 정인이 보고 느껴온 그래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태연의 모습을 부정하는 소리따위 듣고 싶지 않다. 지금 당장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아보려고 손안에 구겨진 시트자락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흐느낌은 새어나오고 만다.

애처롭게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정인을 향해 놈은 비웃듯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좋을대로 생각하라는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놈이 눈앞에서 사라지고나자 정인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인간의 본성을 모두 잃어버린것 같았던 연지의 모습과.. 그런 연지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제 자신....

그리고 이 모든것들을 감당해야하는 운명을 가진 태연이 너무도 가여워 정인은 쉬이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

 

 

  

연지를 본 후로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서너번씩 정인을 확인하러 오던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정인은 본능적으로 놈들이 꾸미고 있는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고 느꼈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아마도 밖은 어둠이 내려앉았을 시각.. 정인은 침대에 누워 시트를 끌어당겼다.

잠은 오지않는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수시로 깨어나는 밤이 계속 되다 보니 몸은 제대로 버텨주질 못하고 있다.

며칠새 겨울 나뭇가지마냥 앙상해진 손가락으로 시트를 꼭 쥐고 억지로 눈을 감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낯선 소음에 정인은 눈을 번쩍 뜰 수 밖에

없었다.

 

잠겨있던 철문이 열리고 놈이 문가에 기대어 선채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들에게 고갯짓을 한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으로 시트를 가슴께까지 끌어당겨 꼭 쥐고 앉아있는 정인의 곁으로 덩치큰 남자둘이 다가온다.

 

겁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쩐일인지 정인은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무슨일이든 차라리 어서 일어나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은 검은 천으로 정인의 눈을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 검은 자루 같은것을 머리위에 씌운 후 정인을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것을 알기에 정인은 어디로 가는건지 따위의 무의미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양쪽에서 정인의 팔을 잡은 덩치들이 문앞에서 멈춰서자 기대어 서있던 놈이 정인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을 가린 천을 사이에 두고도 놈의 기분나쁜 숨결이 느껴지는것 같아 정인은 고개를 돌렸고, 놈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아쉽지만 이만 이별 해야겠네요 유정인검사님. 그럼 잘가요"

 

 

어쩌면.. 어쩌면 살아서 태연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정인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