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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22

 

***

 

 

 

남자들에게 붙들린채 한참 걸어온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일지도 모르겠다..  모든게 명확하지 않다..

지금 정인은 곁에서 팔을 잡고 있는 남자들이 아니라면 그대로 무너져 주저 앉아버려도 하나도 이상할게 없었으니까..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움직이는 정인이 답답해서인지 아니면 안돼보여서인지 양쪽 팔을 잡은 남자중 한명이 낮은 한숨을 뱉으며

정인을 번쩍 안아든다. 나머지 남자가 불만스러운듯 투덜거리는것 같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좀전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어쩌면 이들도 그저 돈 때문에 시키는대로 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겠다고.. 알고보면 이들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이 약해진걸까? 우습게도 자신을 감금하고 있던 이들에게 근거없는 동정심 마저 느끼는 정인이다.

 

어디쯤에선가 잠겨있는 문을 여는듯한 소리가 들리고, 다음순간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느낌이 달라졌다.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건물 밖으로 나온것만은 분명한것 같았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폐부 깊숙히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는

이곳이 지금껏 있던 그 갑갑한 건물 내부가 아니라는걸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

 

"차에 탈겁니다. 외부에서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차단되어 있으니 얌전히 있는게 좋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도 정인이 아무 반응이 없자 남자는 재차 묻는다.

 

"이해했습니까?"

 

정인은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정인의 대답을 확인하자 멈춰섰던 남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언가 금속끼리 부딪히는듯한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묵직한 철제문 따위가 열리는 거친 마찰음이 들린다.

 

"좀 차가울 겁니다."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바닥을 느끼며 정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후 덜컹거리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흔들림에 옆으로 쓰러질뻔한 정인을 좀 전의 남자가 잡아 한쪽으로 기대도록 해준다.

그리고 뜻밖에도 남자는 정인의 머리에 씌워진 자루와 눈을 가린 검은천을 벗겨준다.

가려졌던 눈을 몇번 깜빡이고나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듯 눈앞에 앉은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직사각형의 철제 컨테이너 안은 한쪽에 달린 램프에서 뿜어져나오는 흐릿한 불빛만이 있을뿐 어둠속이나 다름없었다. 정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고, 곧 한쪽 구석에 옆으로 누운 연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지야!"

 

정인은 남자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듯 엉금엉금 기어서 연지의 곁으로 갔다. 연지의 입엔 재갈이 물려있었고, 손도 등뒤로 묶여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듯 정인이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건가요?"

 

"진정제를 주사했을겁니다. 위험하니까요"

 

"그럼 그냥 잠든것 뿐이란건가요?"

 

"그렇습니다."

 

정인의 시선이 다시 연지에게 머문다. 손을 들어 피에 엉겨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넘겨주는 정인의 손등위로 눈물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정인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담요를 끌어온다.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연지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인은 어떻게든 연지를 담요위로 옮겨 눕히고 싶었지만 움직임 하나 하나가 점점 더 힘에 부치고 있었다.

 

"저.. 이아이 담요위로 옮겨줄 수 있을까요?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남자는 별말 없이 일어서 연지를 안아 담요위로 옮겨주고 다시 제자리로 가 앉는다.

 

정인이 있던 방 앞을 지키던 남자들 중 한명인 남자는 낡은 청바지에 어두운색의 야상점퍼 차림이었다. 덩치가 무척 컸고, 단단해 보이는 체격에

삼십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선이 굵은 얼굴을 가졌지만 험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왜.. 눈을 가린 천을 풀어준거죠?.. 풀어주지 않았어도 상관 없었을텐데.."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어둠속에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입술에 접착제라도 바른듯 입을 꽉 다문 남자를 흘깃 쳐다보던 정인은 정말 이대로 죽게될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이들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신을 절대 살려둘리 없다는 확신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정인은 마음속으로 태연을 떠올리며 두눈을 감았다..

부디.. 곁에 누운 이 가여운 아이가 살아서 오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 정인은 희망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니 남자가 조심스레 정인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곧 도착할겁니다. 눈을 다시 가려야합니다."

 

정인은 아직 잠들어있는 연지를 한번 돌아본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나 정인은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누구에게나 피치못할 사정이란게 있는거니까.."

 

눈을가린 천을 묶는 남자의 손길이 잠시 멈칫거리는듯 했지만 이내 검은 자루가 머리위로 씌워졌다.

 

얼마후 차가 세워지고 이제까지 들어본적 없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도 여기부터는 다른이들이 정인과 연지를 어딘가로 또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컨테이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거칠게 정인을 잡아 당긴다.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버린 정인은 질질 끌려 누군가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어졌다. 피가 머리로 쏠리며 거꾸로 흔들리는 통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정인은 이를 악물고 이 모든것들이 어서 빨리 끝나버렸으면 하고

바랬다.

 

차가운 바람이 계속해서 가디건 속으로 파고드는걸 보면 실내는 아닌것 같았고, 느낌상 꽤 많은 계단을 올라온것 같다.

이윽고 어딘가에 도착해 남자는 정인을 철제 의자에 앉히고 등뒤로 손을 돌려 묶은 후 발 역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는다. 그리고 의자에서 꼼짝달싹

못하도록 단단하고 거친 줄로 몸과 의자를 한데 칭칭 감아 묶어버린다.

 

머리위에 씌워졌던 검은 자루가 벗겨지자 눈을 가린 검은천을 통해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온다.

 

정인을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렸다.

조금씩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점점 더 커지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햇살이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 붉은 빛 가운데 두눈이 가려진 정인은 어딘지 알수 없는 공간에 꼼짝없이 묶인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남겨졌다..

 

 

 

 

***

 

 

 

정인이 납치되고 꼬박 나흘.. 또다시 밤이 찾아오고 혼자 남은 텅빈 집안.. 곳곳에서 정인의 환영을 보며 태연은 수없이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혈액이 반쯤 남은 와인잔을 끝내 벽을 향해 던져버린 그는 소파 아래 쪼그리고 앉아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은채 죽은 사람처럼 꼼작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곧..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터져나온 눈물을 막을 수 없던 태연의 입에선 괴로움에 찬 비명이 내질러졌다.

보고싶다.. 가벼운 키스에도 곧잘 핑크색으로 물들던 뽀얀 얼굴도.. 저를향해 웃어주던 동그란 눈망울도.. 미칠듯이 보고싶다.. 죽을듯이 그립다..

그녀가 없는 제 인생이 대체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흔적도 찾을수가 없었다. 놈은 정인의 행적을 쫓을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정인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낸것처럼

어디에도 ..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살아만 있기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두번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녀가 저를 깨끗이 잊는다고 해도 상관 없다.

유정인이라는 여자가 살아서 제 인생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저 같은건 수백번 다시 잊혀진다고 해도 견딜 수 있다.

 

"제발.. 정인아.. 살아있어줘.. 미안하다.. 미안하다 .. 널 사랑하는게 아니었는데..  나같은 놈이 니 사랑을 받는게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수없이 되뇌어지는 정인의 이름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태연의 심장을 난도질 하고 있었다.

 

스스로 날카로운 비수를 만들어 쉼없이 제 자신을 질책하던 태연은 지난 나흘간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도 모르는사이 소파아래 웅크린채 잠들었던 태연은 탁자위에서 몸을 떠는 직사각의 기계가 만들어내는 소음에 번쩍 눈을 떴다.

혹시라도 정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진 않을까.. 그냥.. 제게 화가나서 잠시 떠나있었다고 .. 이제 생각이 정리되었으니 돌아오겠다고 말하지는

않을까.. 수없이 헛된 상상을 했었다..  덕분에 태연은 지난 나흘간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 대부분 발신자를 확인하지 못한채 급히 받았다.

지금도 역시 태연은 발신자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 여보세요..?

 

== 어지간히 급하신가보네요 민태연 검사님

 

들어본적 없는 낯선 목소리.. 그 안에 담긴 비릿한 웃음이 전해져오자 태연은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하지만 역시 발신자표시는 뜨지 않는다.

 

== 어어? 왜 말이 없으실까? 유정인검사의 생사가 궁굼하지 않으신가?

 

== 나한테 원하는게 있다면 유정인한텐 손끝하나 대지 않는게 좋을거다.

 

놈의 목소리로 정인의 이름을 듣는순간 머릿속에 불길이 이는것 같았지만 태연은 애써 침착을 가장해야 했다. 놈이 제게 전화를 걸어온건 분명

제게 바라는게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직 정인이 살아있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가 된다.

 

== 오호~ 생각보다 침착하군 그래? 의외인걸?

 

== 원하는게 뭔지 말해.

 

== 으흠~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유정인검사를 되찾고 싶거든 내일 오후 4시까지 그 주소로 오도록해. 물론! 혼자 와야 한다는것쯤은

   말 안해도 알겠지?  꼬리가 붙었다고 판단되면 그 즉시 그여잔 이세상 사람이 아닌게 되는거야.

 

 

놈이 말하는 동시에 주소를 적은 문자가 도착하고.. 뼈마디가 하얘지도록 꽉 쥐어진 태연의 주먹이 분노로 떨려온다.

 

 

== 유정인....

 

태연은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정인의 이름을 입에 담는것 만으로 가슴 깊은곳에서 울컥 치미는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 뭐지? 말은 끝까지 알아듣게 해야지 민태연검사.

 

놈의 비아냥 거림에 태연의 눈빛이 분노로 푸르게 빛난다. 정인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 놈을 자극하는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고

태연은 애써 분노를 눌러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유정인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있나.

 

== 하! 바라는게 좀 많은거 아니야? 지금 그럴 입장이 아닐텐데?

 

태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 뭐 좋아. 서로 확실한게 좋겠지.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지만 태연은 가만히 휴대폰을 그러쥔채 눈을 감고 기다릴 뿐이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올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후 다시 울리는 휴대폰 액정에 영상통화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태연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전화를 받았다.

 

 

 

'정인아..! '

 

화면속 정인의 모습은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때와는 너무도 달라보였다. 며칠새 바싹 말라버려 부서질것 같은 정인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태연은 울컥 솟아나오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 유정인검사님? 인사해야지? 민태연한테 당신이 살아있다는걸 알려줘야 할거 아냐? 자 안녕~ 해보라구

 

축 늘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인이 놈의 입에서 나온 태연의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천에 가려진 눈가를 따라 금새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는 태연의 가슴이 온통 타들어가는듯 아파와 숨을 쉬는것조차 버거워진다.

 

== 정인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정인의 이름이 수화기를 통해 정인의 귀에 전해지자 무겁게 닫혀있던 정인의 입술이 달싹인다.

 

== 민검사님! 놈들이 연지를 데리고 있어요!

 

다음순간 정인의 곁에 서있던 누군가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고, 정인은 그대로 기절한듯 힘없이 늘어져버린다.

 

== 정인아! 정인아!! 유정인!!!

 

애타게 부르는 태연의 목소리에도 정인은 움직임이 없다.

 

-- 봤지 민태연? 유정인검사는 살아있어. 그러니까 와서 데려가라고. 할수 있다면 말야. 크큭

 

놈의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끝으로 전화는 끊겨버렸다.

 

태연은 그대로 무너져내려 바닥을 치며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태연은 그렇게 상처입은 짐승처럼 고통에 몸부림쳤다.

 

 

 

 

 

 

신은 어째서 태연에게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가지게 만들었을까.. 어째서.. 이토록 끔찍한 운명의 한가운데 정인은 던져진것일까..

 

어쩌면 이 끔찍한 고통의 굴레속에 두사람은 함께 가둬졌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서로의 심장을 관통하고 엉겨붙어 고통없이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