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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20

 

***

 

 

 

태연은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계단을 오르며 땀이 차오르는 주먹을 꽉 쥐고 발소리를 죽여 정인의 집 문앞에 선다. 

빌라는 각 층마다 네가구가 두집씩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현관쪽에선 안을 살필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현관 가까이 귀를 대고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고, 작지만 안에 누군가 있다는걸 확신하게 하는 소음이 들린다.

다음순간 망설임 없이 빠르게 도어락을 해제하고 벌컥 문을 연 태연의 시야에 들어오는건 다름 아닌 엘의 모습이었다.

정인을 데려간것이 엘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지만, 그를 보는 순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엘로 인해 공포에 떨며 바로 이곳,

거실에 주저앉아 수화기를 붙들고 말도 못한채 울기만 하던 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바로 분노로 돌변해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꽉 물게 만든다.

한걸음에 엘의 바로 코 앞까지 다가간 태연은 그의 멱살을 쥐고 벽으로 힘껏 밀어붙혔다.

 

"여기서 뭘하는거야! 그렇게 겁을 주고도 모자라?! 대체 니가 원하는게 뭐야! 이자식아!!"

 

이를 갈며 내뱉은 태연의 목소리에도 엘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채 귀찮다는듯 태연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보고 싶었던건 민태연 네놈 얼굴이 아닌데 말야. 대체 어디다 꽁꽁 숨겨뒀는지 그 여자 통 보이질 않네?"

 

거실 한쪽 책장에 놓인 정인의 사진을 손끝으로 쓰다듬던 엘이 태연을 돌아본다.

 

"유정인이 납치된것과 넌 상관없다는걸 말하고 싶은건가?"

 

엘의 입가에서 웃음이 가셨다.

 

"납치? 누가? 그여자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네놈이 꽁꽁 숨겨두고 있었잖아 아니야?"

 

태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반대로 엘의 손에 태연의 멱살이 잡혔다.

 

"무슨 개소리냐고 묻잖아! 민태연 니놈이 지켜준다면서! 나한테서든 누구한테서든 지켜준다고 데려간거 아니였어?!"

 

엘에게 멱살이 잡힌채 태연은 힘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면 엘이 정인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던것 같다. 지금.. 엘의 이런 반응이 전혀 새삼스럽지가 않은걸 보면 말이다.

차라리 녀석이 저를 탓하며 정인을 대신해 주먹이라도 날려주길 바랬다.

 

"미친놈!"

 

차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엘은 치켜들었던 주먹을 내리고, 내팽개치듯 잡고있던 태연의 옷깃을 놓아버렸다.

 

 

"아는게 있다면.."

 

처음으로.. 엘의 붉은 눈빛앞에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태연은 말끝을 흐렸다.

 

"지켰어야 하는거 아냐? 넌 이미 자격이 없어. 뭔가 안다고해도 네놈한테 알려줘야 할까?"

 

돌아서 사라지는 엘의 뒤로 태연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

 

 

 

음식을 가지고 들어온 남자는 침대위에 쪼그리고 앉은 정인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잤어요? 별로 못잔 모양이네.. 그렇게 먹지도 않고 제대로 잠도 않자면 몸 상한다니까요. 내 얘기 기억하죠? 당신이 죽어버리면

그 꼬맹이도 죽는다니까, 별로 그걸 바라진 않을거 아니에요? 오늘은 전복죽 가지고 왔으니까 들어요. "

 

걱정스런 말투로 협박을 잊지 않는 남자를 향해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정인은 괜한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연지.."

 

차갑게 식은 음식이 담긴 식판을 가지고 돌아서던 남자가 정인의 목소리에 멈춰서 돌아본다.

 

"연지는 어디있지? 여기 있는건가?"

 

"뭐, 잘 있다고만 해두죠. 그런데 그건 왜 묻죠?"

 

"연지를 보게해줘. 그 동영상만 보고 내가 그애가 살아있다는걸 어떻게 알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남자는 제 턱끝을 매만지며 정인의 표정을 살피다, 피식 웃어버린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좋아요. 보게 해주죠. 언제가 좋을까요?"

 

"지금 당장."

 

"흐음~ 뭐.. 좋아요. 어려울거 없으니까"

 

 

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에 침대에서 급히 내려서던 정인은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휘청인다.

언제 다가온건지 남자가 정인의 팔을 잡아 세우자, 정인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침대위에 게어진 스웨터를 집어들었다.

남자는 좋을대로 하라는듯 양손을 들어보이며 피식 웃었고, 정인은 한껏 증오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돌아선다. 정인은 들고 있던 스웨터를 며칠새 앙상해진 어깨에 두르고 그 뒤를 따른다.

호텔에서 정신을 잃고 이곳에서 눈을뜬지 꼬박 사흘.. 처음으로 이 방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나고 있는 복도는 여지껏 정인이 지내던 방과 다를바 없이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마주보는 회색의 시멘트벽엔 정인이 나온곳과 같은 철제문들이 줄지어 있고, 그 사이로 길게 뻗은 복도의 모습은 흡사 감옥 같아 보였다.

대체 저 방들 안엔 누가 갇혀 있는걸까.. 정인은 솟아나는 의문들을 꾹꾹 누르며,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려 제 뒤를 따르는 덩치 큰

남자 둘을 돌아 보았다.

살짝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감정없이 제 할일만 하는 로봇 같아 보일만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걷고 있었다. 정인은 문득 저 둘은 자신들이 하는일이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란걸 알고 있을지가 궁굼해졌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정인은 남자의 부르는 소리에 멈춰섰다.

이미 긴 복도의 끝에 다다라 있었고, 남자의 등뒤로 또다른 철제 문이 보인다.

남자는 또한번 정인을 비웃듯 피식 소리를 내며 웃고는 돌아서 문에 열쇠를 꽂는다.

 

열려진 문 밖으로 나온 정인은 좀전과는 대조적으로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벽과 바닥에 언듯 눈이 시린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사각형의 방을 이루고 있는 벽엔 각각 두개씩의 문이 있었고, 그중 한개의 문을 열고 흰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오셨습니까"

 

"실험은 잘 되가고 있나요?"

 

"그럼요.걱정마십시오"

 

 

'실험?.. 무슨 실험?.. 대체 무슨짓을 꾸미는거지?'

 

정인에게 그들의 대화는 어째선지 무척 위험하게만 들렸다.

 

 

남자가 고갯짓을 하자 흰가운을 입은 남자가 정면에 보이는 문으로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연다.

 

"가실까요?"

 

남자의 목소리에 정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제로 떼어 문앞으로 다가간 정인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얼어붙은듯 굳어버렸다.

 

그곳에는 온통 피에젖어 말라붙은 옷을 입은 연지가 어떤 여자의 목에 이를 박은채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