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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마자 태연은 순범과 동만을 불러냈다.
회의실 탁자위에 놓인 태연의 휴대폰에서 새벽에 걸려온 영상통화의 녹화된 화면이 플레이 되자 동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인의 이름만 되뇌였고, 순범은 머리끝까지 치미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유검사님.. 흐엉.. 유검사님.. 어떡해요. 유검사님 어떡해요"
"이 자식이 누가 죽기라도 했어?!! 그만 그치지 못해?!"
순범이 무섭게 윽박지르는 소리에도 동만은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너한테 전화가 온거냐? 어떤 새낀지는 모르는거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태연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순범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최동만"
더할수 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부수고, 한참만에야 들려온 태연의 목소리에 훌쩍 거리던 동만은 눈물을 닦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짐작이라도 한듯 짐짓 비장해 보이는 얼굴로 태연을 본다.
"우선.. 번호부터 추적해봐. 아마 대포폰이겠지만 그래도 해보는데까진 해봐야지. 그리고.. "
태연은 마음을 가다듬듯 한숨을 내쉰 후 휴대폰을 내민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만한게 없는지도 찾아보고.. 놈이 보낸 주소가 정인이가 있는곳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멈춰진 영상속 정신을 잃은 정인의 모습을 다시한번 눈에 담으며 태연은 이를 악문채 동만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휴대폰을 받아들고 회의실을 나가는 동만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태연의 시선이 자신을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서있는 순범의
시선과 마주하자 무너지듯 떨궈져버린다.
"형.. "
"그래.. 난 뭘 하면 되겠냐.. 얘기만 해라 내가 할수 있는건 다 할테니까"
울음이라도 참는것처럼 꽉 쥐어진 주먹을 입술위에 댄채로 아무말도 하지 않던 태연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늘 오후
놈이 말한 장소로 혼자 가겠다고 말한다.
"뭐?! 야 인마 거기 무슨 함정이 있을줄 알고! 안돼! 그건 유검도 바라지 않을거다"
"정인이가 바라던 바라지 않던 나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어 형. 만약 내가 가지 않으면 정인이가 죽어. 알잖아 형... 내가..
정인이 없이.. 내가 .. 살 수 있을거 같아?"
"좋다 그래, 그럼 간다고 치자. 유검이 저런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 니 동생 연지가 있다고 말했을때는 유검이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을 했다는 소린데 너 혼자 가서 두사람을 무슨수로 다 구해낼꺼냐."
"직접 부딪혀 보는거 말고 할 수 있는게 없잖아. 내 목숨이랑 맞바꿔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거잖아 형.. 나같은게 뭐라고..
나같은 놈이 뭐라고 .. 정인인 지금도 자기 걱정은 안하는데..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무엇보다.... 놈들이 원하는게
나라는게 확실해졌어! 눈 감는다고 진실이 바뀌는것도 아닌데 정인이 목숨을 담보로 내 살 궁리나 하라구? 아니! 형 .. 난 그렇겐
못해"
숨통이 막힐만큼 답답할 노릇이지만, 눈물까지 글썽이는 태연의 말에 어느 하나 틀린구석이라곤 없었다.
순범은 한숨을 내쉬며 서지도 앉지도 못한채 좁은 회의실 안을 불안하게 서성이기만 한다. 그러다 끝내 치미는 화를 어쩌지 못하고
욕설을 뱉으며 들고있던 펜을 있는힘껏 던져버렸다.
**
왼쪽 뺨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여전히 눈앞은 검은천에 가려져 있는채였고, 얇은 가디건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피부가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타닥거리며 장작 따위가 타는듯한 소리가 들리고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추위에 더해진 공포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몸을 바로잡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정신을 잃기전 들었던 태연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눈물은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차오르고 넘친다.
그를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둘째치더라도 지금 당장 느껴지는
추위와 몸 구석구석을 들쑤시는 통증은 다시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입술을 꼭 깨문채 흐느끼던 정인은 담요따위가 몸을 감싸는 느낌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
"바보같은 짓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차안에서 보았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담요를 여며주며 어째선지 남자는 한숨을 내쉰다.
"뭘..얘기하는거죠.."
"그 앤 사람 피를 먹고 삽니다. 인간이 아니라는거죠. 그런데 당신은 그런앨 살리기위해 기꺼이 목숨도 버릴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연지를 가엽게 여기지만.. 그녀의 목숨이 중요한건.. 그 저편에 태연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독히 이기적인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깟 목숨에도.. 세상에도.. 미련같은건 없는데..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있고.. 그사람을 위해서 그아이가 살아서 돌아갔으면
해요... 그럼 미련 같은거 하나도 없이 정말 편해질 수 있을거 같거든요. 난 그저 내 마음이 편안해지길 바래요. 뭐랄까..
그래요. 난 그냥 이기적인것 뿐이에요"
"이기적이라는 말이 그렇게도 쓰이는줄은 몰랐네요. 도와줄 수도 없으면서.. 아니, 오히려 괴롭히는 쪽에 서서 이런말이
어떻게 들릴지 압니다만.. 꼭 살아서 그사람 곁으로 돌아가길 빌겠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도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것 같다고 느껴지는건 그저 약해질대로 약해진 마음 탓일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정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살아서 그의 곁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상하게도
이미 모두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미련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제 힘으론 아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지긋지긋한 세상에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악다구니를 퍼붓던 제 목숨에도..
아직.. 아직 다 주지 못하고 제 안에 머물러 있는 태연에 대한 사랑에도 .. 미련은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살고 싶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다.. 아니 다른건 아무래도 좋다. 그저.. 살아서 그를 다시 보고 싶다.
급작스럽게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리움은 정인을 미치도록 살고싶게 만든다.
정인은 손목이 다 쓸리는것도 상관하지 않고 의자뒤로 묶인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단단히 묶인 끈은 좀처럼 느슨해질
기미도 보이질 않는다. 살고싶다는 의지가 확실해지자 가려진 시야도.. 손하나 까닥하기 어려운 지금의 상황에도 미칠것 처럼
화가 났다. 아무리 애써봐도 묶인 끈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는 커녕 손목의 상처만 더해갈 뿐이다.
저는 물론이고 태연 조차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어째서 태연을 가만히 두지 않는걸까..
어쩌다 태연과 자신은 서로에게 이토록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걸까..
태연은.. 그는 왜 이토록 가혹한 운명과 싸워야 하는걸까..
정인의 마음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버릴즈음 그녀의 손목에선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덫에 걸린 여린 짐승처럼 애처롭게 울부짖는것 외에 정인이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고.. 약속된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뭐 좀 알아낸거라도 있어..?"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줄곧 컴퓨터 앞에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만큼 집중하고 있던 동만의 표정에서
아무 희망도 읽어낼 수 없었던 태연은 그 답지 않다고 느낄만큼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고, 그의 질문에 작은 무엇이라도 힘이 될수 있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던 동만은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것 같은 얼굴로 작게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언제나 그들 사이에서 어깨를 두드려주며 기운을 북돋워주던 순범 역시 오늘만큼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또다시 가슴을 짓누르는 침묵속에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는 세사람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제껏 한번도 .. 이토록 무기력해져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인의 목숨이 담보가 되어있는 한 특검팀의 누구도 섣불리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바꿀 수 없는 사랑이고, 동료이며, 친구이고.. 이들 세사람에겐 이미 소중한 가족이 되어있었으니까..
무엇을 어디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각자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갈등에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이윽고 태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사람 다 아까 얘기한대로만 해줘.."
태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동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채 불안한 얼굴로 태연과 순범을 번갈아 보기만 했고, 고개를 숙인채
한차례 마른 세수를 한 순범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일어서 태연을 바라봤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거냐..? "
"내가 가지 않고는 아무것도 해결되는건 없어."
"후... 그래.. 그렇지.. 그렇겠지.. 알았다. 믿을만한 후배녀석들 대기시켜 놨으니까 나중일은 걱정말고.. "
반쯤 체념한듯 순범은 두눈을 꾹 감았다 뜨며 태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응급구조대 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조치해 둘게요. 저기.. 민검사님.. 조심하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짐받듯 말하는 동만에게서 휴대폰을 받아든 태연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범과 동만이 각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동안 태연은 잠시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집무실로 들어갔다. 입고있는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가죽재킷을 집어들었다.
가죽재킷에 팔을 끼워넣으려던 태연의 눈에 책상위에 놓인 사진 속 정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태연은 입으려던 재킷을 책상위 한켠에 아무렇게나 던지듯 놓아두고 액자를 집어들었다.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정인의 얼굴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태연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미안하다 정인아.. 힘들게 해서 .. 아프게 해서.. 미안해.. 곧 갈게.. 조금만.. 조금만 더 견뎌줘.. "
태연은 집무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유리벽 너머 비어있는 정인의 자리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두사람의 모습도.. 모두
눈안에 담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태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뜨겁게 달궈진 감정의 덩어리를 힘겹게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밖에 있는 두사람에게도 .. 정인에게도 이토록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만들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만에 하나라도 알았더라면 운명을 거스르는 사랑 따위 끝까지 숨겼을텐데...
태연은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이런 고통을 겪기에는 정인에게 제가 준 행복은 너무 작았고.. 너무 짧았다...
'내가 없다면.. 넌 또 울겠지..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야.. 넌.. 그럴 수 있을거야.. '
만약 두사람 모두를 구해낼 수 없다면.....
태연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싸워야할 상대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채 태연은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질 준비를 그렇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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