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질투
정신을 잃은 정인을 보는순간 동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있는것이 다름아닌 태연이라는걸 확인한 다음부터 내려앉은 심장엔 어느새 무언가 다른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어떻게.. "
다 끝맺지도 못하는 한마디로 .. 왜 이제서야 그녀 앞에 나타난거냐고, 어째서 제가 이런 마음이 되고서야 돌아온거냐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는다.
"우선 정인이 집으로 가지.. 얘기는 그 다음에 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입에서 이토록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이 불려진적이 전에도 있었나?.. 동만은 잠시 멍하니 태연을 바라본다.
정인의 얼굴위로 떨어지는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그가 .. 민태연이란 남자가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그래서 그에게도 그런것이 있기는할까 의심스럽기까지 했었던..
정인을 향한 그의 마음마저도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그 마음이 가지는 이름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마저도 쉽게 인정해버린다면 그대로 무너져버릴것 같다. 저도 모르게 꽉 쥐어지는 주먹을 감추며 동만은 한참만에
더듬거리며 정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네? 아.. 그럼 제가.."
"아니, 내가 유정인 차로 가지"
"아.. 네..."
이렇게 쉽게, 이토록 바보같이 물러나버리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치솟아도...
동만은 이를 악문채 둘의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정인의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고, 주차된 차들 가운데 정확히 정인의 차앞에 멈춰선다.
그리고 세상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런 손길로 정인을 차에 태우고 있다..
마치 바로 어제까지도 정인과 함께해온 사람처럼 아니, 한번도 떠난적 없던것처럼.. 둘의 모습은 지독히도 자연스럽다.
"누나 이사했는데.. 아세요?"
"알아"
그는 대체 언제부터 지켜봐온걸까.. 그에게도 정인은 지울 수 없는 기억과 마음과..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걸까..
태연이 운전하는 정인의 차를 쫓아 그녀의 집으로 가는길.. 동만의 머릿속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하지만.. 제 품이 아닌 태연의 품에 안겨 잠든 정인의 모습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순간 그 모든 생각들은 단 한가지
질문만을 남긴채 모두 날아가버린다.
정말.. 이대로 끝내도 좋은걸까.. 이제와서 그에게 고스란히 그녀를 내어주고 물러나는게 정말 가능할까..
이미 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은 결국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만들며 사그라든다.
정인을 안고 있는 태연을 대신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나란히 선채 동만은 층수를 알리는 숫자만 뚫어질듯 노려본다.
"늘 이런식인가?"
"예?"
앞뒤 다 잘라먹은 태연의 질문에 놀라 고개를 돌리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인에게 붙들려있다.
"금요일 밤마다 그 클럽으로 정인일 데리러 가는거야?"
"아.. 뭐.. 누나가 전화할때도 있고.. 연락이 없으면 제가 찾으러도 가고.. "
"많이.. 가까워졌나보네.."
"네?"
"두사람.. "
그의 시선이 제게로 잠시 옮겨왔다 돌아간다. 그제야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동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했으니까요.. 어딘가로 사라지는건 아닐까.. 정말 저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불안했으니까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5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두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익숙하게 집안에 불을 밝히고, 정인의 침실문을 열어주고나자 문득 지금 이게 뭐하는짓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어 둘의 모습을 보고있기가 힘들어 진다.
"거실에 있을게요.."
동만은 애써 담담한척 두사람을 남겨둔채 방문을 닫아버렸다.
***
8.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란건..
커다란 침대위에 파묻히듯 누운 정인은 약기운인지 술탓인지 가쁜 숨을 색색거리며 뱉어내고 있다.
몇번이나 손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하던 태연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다시금 손을 들어 헝클어진 정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넘겨준다.
"다 잊었으면.. 너답게.. 유정인 답게 씩씩하게 잘 지냈어야지.. "
마지막으로 정인을 보았던 그날.. 처음으로 품안에 안아보았던 그녀에게서 느꼈던 희미한 온기를 떠올리며 태연은
괴로운듯 눈을 감는다.
수도 없이 미안하다고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도 입을 막고 있던 테잎이 떼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건
다른 무엇도 아닌 저를 걱정하는 부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왜.. 어째서 저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보여주지 못한것일까
태연은 스스로를 저주했다..
부디 신이 있다면 제발 그녀에게 남아있는 온기를 빼앗지는 말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는 대신 그녀의 기억에서 그를 지워버렸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걸까.. 미간을 찡그리며 괴로운듯 신음을 뱉는 정인의 모습에 태연은 이불밖으로 나와있는 정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찡그려진 작은 이마위에 가만히 손을 얹자 정인의 표정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워진다.
"가지마.. 가지말아요.."
정인은 태연의 손을 꽉 잡은채 꿈속의 말에 소리를 입혀 내보낸다.
"넌 지금 누굴 만나고 있는거니.. 꿈속에서도 기억하지 말았어야지.. 기억나지 않는건 그냥 버렸어야지.. 어째서 그걸
붙들고 있어.. 왜 넌 아직도 이렇게 바보같니.."
손끝에 닿는 정인은 아직도 이토록 따스한데.. 그녀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것처럼 위태롭다.
그것이 못견디도록 아프고 슬프다..
태연의 손길이 쉼없이 부드럽게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느때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정인의 눈가를 따라 또르륵 눈물이 한방울 떨어져내린다.
"울지마.. 정인아..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 없어.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그러니까 울지마.."
**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동만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스탠드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안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태연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듯 문을 닫는다.
"누나는.."
"아침까지 자게 두면 될꺼야."
"그냥 잠든건 아닌거 같고, 클럽에서 무슨일 있었어요?"
"우선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어깨를 다독이는 태연의 손길이 무척이나 낯설다. 지금 당장 방안으로 들어가 정인의 곁에 있고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게
화가 났고, 마치 오래전부터 이자리에 있었던 사람인듯 오히려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는 태연의 존재 또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만은 애써 그 모든 감정들을 가슴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동만은 이미 알고 있다. 그와 그녀를 이어주는 무엇인가는 절대 제 힘으로는 끊어낼 수 없다는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거대한 원 안에서 맴돌며 만나지 못했던 것이고, 자신은 그 테두리 밖에 있다는것을 말이다.
새빨간 카우치를 바라보는 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고, 그 모습에 동만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무거운 생각들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전혀 안어울리죠? 누나 취향이 독특하다는거 알고 계셨어요?"
두남자는 마주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카우치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태연이 할 수 없다는듯 고개를 저으며 앉고나자, 동만도 한쪽에
놓인 사각 스툴을 끌어다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좀전까지 마시던 생수병을 집어들던 동만이 그제야 생각난듯 태연에게 마실것을 권하지만 태연은 말없이 고개만 젓는다.
동만을 보며.. 어쩌면 정인의 곁엔 이처럼 평범하게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살뜰하게 챙겨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는 생각이라는걸 태연도 알고 있다.
그동안 정인은.. 그리고 자신은.... 또.. 이제 제법 남자다워진 이 어린친구 또한.. 전혀 행복한것 같지 않다.
태연에게서 클럽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은 동만은 정인을 그 지경이 되도록 혼자 내버려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조금더 일찍 찾아갔어야 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은 오후부터 줄곧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만큼 걱정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렇게나 흐트러지는 정인의 모습을 보고있어야 하는것이 겁이났다.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 따위를 저로서는
채워줄 수 없다는것에만 화내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자리에 자신이 있었다한들 태연이 그랬던것처럼 정인을
지켜낼 수 있었을지 역시 알수 없다.. 그의 앞에서.. 자신은 너무도 초라하다.
"이제 완전히 돌아오신거에요?"
"아마도.."
"대체 그동안 어디 계셨던거에요? ..민검사님. 누나가 왜 검사가 됐던건지 ... 그게 누나한테 어떤 의미였는지..
기억하세요..? 그걸 다 놔버릴만큼 힘들어했어요.. 아세요?"
"얘길 하자면 길어.. 염치 없지만.. 그냥.. 나한테도 사정이 있었다고만 알아주면 좋겠군.."
"차라리 이유라도 알고 힘들어했다면 좀 나았을거에요.. 누난.. 자기 마음이 왜 그렇게 힘든건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냥
그렇게 아파했어요. 지금도.. 아파하구요... 꼭 검찰을 그만둬야 했냐고 물었더니 누나가 뭐랬는지 아세요...
얼굴도 모습도 생각은 안나는데.. 그냥 거기 있는게 힘들다고.. 순간순간 아련하고.. 그립고.. 왠지모르게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하루는 민검사님 집무실에 들어갔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파져서 한참을 울었다고 ..근데 자기가 왜
그러는건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미쳐버리는건 아닐까 겁이 났다고.. 그 속에서 뭘 할수 있었겠냐고 ...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덤덤하게 얘길하는데 정말...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거 얼마나 아플지 전 생각조차 못하겠어요.
아마 그래서 결국 마음을 걸어 잠근걸테죠.. 누난.. 그렇게 자길 가둬버렸어요. 그렇게 3년이에요.. 민검사님.
그날에 대한 기억도.. 민검사님에 대한것도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하면서 기억에도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한게 자그마치
3년이라구요.. 누나가 그 클럽에 가는것도 알고, 이사한것도 아시면서..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
왜 이제서야 나타나신건데요! 왜요!"
자신도 모르게 격앙된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채 내질러버린 말속엔 결국 제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버린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깨달은 후에야 돌아와버린 태연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잊었다면.. 정인이가 머리로든 마음으로든 깨끗하게 날 지워냈다면..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사랑하고.. 행복해졌다면..
돌아올 생각조차 할 수 없었겠지.. 그리워하는건.. 그정도 고통은 내가 견뎌야할 내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 만약 그랬더라도 정인이 앞에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을지.. 참.. 생각대로 되지 않지?.. 마음이란거..
난.. 마음으로든 머리로든 잊은적이 없어.. 정인이 웃음도, 눈물도.. 화를 낼때 어떤 표정인지.. 뭔가 고민할때 어떤 얼굴이
되는지.. 단 한순간도 잊질 못했어. 마음은.. 그래, 사랑이란 놈은 가슴 깊숙히 묻어두고 모른척 할 수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얼굴을 무시하는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 이제와서 다시 나타나 정인일 혼란스럽게 하는게 정말
맞는건지 수없이 많이 생각했지만 내 결론은 ..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거였어.
날 기억하도록 하자는게 아니야. 차근차근 한발짝씩 다가가서 내 마음을 알게 해주고 싶고.. 정인이 마음을 ..얻고 싶은거다.
그게.. 내가 돌아온 이유야"
태연의 대답은 단 한마디의 반박도 할 수 없을만큼 단호하고 명료했다.
그는 마치 동만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것처럼 마음이란.. 사랑이란 뜻대로 되는게 아니지 않더냐고 물어오기까지 한다.
예전에 그의 것이었을 정인의 마음은 이제는 다르다고.. 그건 그저 그녀 가슴속 깊은곳에 남은 실체 없는 아련함 같은것일
뿐이라고.. 그러니 여기 당신의 자리는 더이상 없다고 되는대로 떠들어서라도 그를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정인이 가진
그 지독한 그리움의 대상이 누군지 그녀 자신은 알지 못해도 동만은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건데요.. 여기서 누나가 깨어나길 기다리실건가요.."
"글쎄.."
"시간이.. 필요해요.. 누나 깨어나면 제가 얘기할게요. 그런 다음에 .. 그 다음에.. "
금방이라도 울어버릴것 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끝내 말끝을 흐리는 동만을 보는 태연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래.. 마음은 뜻대로 되는게 아니다.
늘상 순범에게 정인에게 쥐어박히면서도 웃음으로 넘기던, 그래서 나이보다도 훨씬 어리게만 보이던 .. 철없어보이던
그 최동만은 이제 더는 없었다. 어느새 정인에게도 순범에게도 제법 의지가 되는 의젓한 남자로 제 앞에 선 동만은 정인에
대한 제 마음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적어 동만의 손에 쥐어주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나오는 태연에게 동만은 순범의 얘기를 했다.
"황형사님 번호 그대로에요. 민검사님한테 연락 올지 모른다고.. 아직 기다리고 계세요. 황형사님은 한번도 민검사님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단 생각 안하셨어요. 여태 하루도 포기한적 없으셨어요."
동만의 걱정어린 당부에 태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주었다.
"그래, 만나러갈테니 걱정마"
태연의 대답에 만족한듯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만의 얼굴이 태연의 기억속 그의 모습과 겹쳐져 보인다.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음에 위로받으며 어둠속을 걷던 태연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익숙한듯 단축번호 하나를 꾸욱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태연의 눈가에 물기가 차오른다.
"나야.. 형.."
***
9. 그래도.. 난 아닌거잖아..
아침 10시가 넘도록 닫겨진 정인의 방문은 열릴 생각을 않는다.
주머니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쪽지를 몇번이나 쥐락펴락 하는 손끝만큼 동만의 마음도 불안함으로 분주하다.
벽에 걸린 시계바늘이 열한시를 막 지나고 있을즈음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정인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방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괜찮아?! 머리 아픈거야? 누나!"
"몇시야..?"
"어? 어.. 열한시.. 괜찮은거냐니까 뭐 머리가 아프다거나 속이 메스껍다거나 그렇진 않아?"
쉴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동만을 못마땅한 눈길로 흘깃 쳐다본 정인은 귀찮다는듯 손을 휘휘 저으며
거실 카우치위로 던지듯 몸을 뉘인다.
"넌 어떻게 된 애가 점점 더 시끄러워지니... 내가 항상 말하지? 한번에 한가지씩만 하자 좀. 근데 내가 어떻게
집에 온거지?.. 가만있어봐.. 어제.... 맞다!"
벌떡 몸을 일으키던 정인은 뇌가 흔들리는것 같은 느낌에 끙 소리를 내며 다시 누워버린다.
"그 망할 녀석이 준 술을 마시고.. 막 어지러웠구... .. 그 자식이 날 밀쳤는데.. 음.. 분명히 누가 와서 도와줬는데.."
"기억나? 누나 도와준 사람?"
"잘.. 모르겠어.. 그때 내가 거의 정신이 없었거든.. 근데.. 내가 아는 사람 같았는데... 누구였어? 너 알아?"
동만은 괴로운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어젯밤의 일들을 떠올리려 애쓰던 정인은 커다란 유리컵이 눈앞으로 내밀어지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셔, 물 많이 마시게 하랬어. 대체 누나는 어쩌자고 그런 놈들이 주는 술을 덥썩덥썩 받아 마시는건데?! 생각이 있어?
제발 조심 좀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그렇게 말을 안들어? "
동만이 평소와는 다르게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는 통에 당황한데다, 별로 잘한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정인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얌전히 물만 마시고 있다.
"후.. 정말 누나는 도대체가 "
"야..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알겠는데.. 물을 많이 마시게 하랬다니 누가 그랬단거야? 나 혹시 병원 실려갔어?
근데 내가 하나도 기억 못하는거야 지금? "
동만은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부딪혀야 하는 일이라는것 역시 알고 있었다.
"아냐.. 병원 안갔어.. 누나 도와준 사람이 얘기해준거야. 아마 술에 수면제나 최음제 같은게 들어있었던거 같다고.. 후...
욕조에 물 받아줄께 우선 씻어. 그리고 밥 먹자. 그런 다음에.. 이따 오후에 만나게 해줄께.. 누나.. 구해준 사람.. "
"누군데..?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래?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그사람이 나한테 가까이
다가왔을때 뭔가 익숙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던거 같아.. 누군데? 어?"
"보면.. 알아.. 물 받을께"
동만은 도망치듯 방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버렸고, 정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굼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따뜻한 물이 욕조에 차오르는걸 보며 동만은 밤새 꼬깃해진 쪽지를 주머니속에서 꺼냈다.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어느때보다 힘겹기만 했고, 신호음이 더해갈때마다 심장은 쪼그라드는것 처럼 괴롭다.
"저에요 최동만. 네.. 괜찮은거 같아요.. 네.. 3시쯤 괜찮으세요..? 아뇨 아무말도....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해줄 수 있는
얘긴 없는거 같아서요. 어제 일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냥 아는 얼굴인것 같았다고.. 네..
그래서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어요. 네.. 그럼 그때 뵐께요.. "
전화를 끊고.. 동만은 욕실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욕조에 등을 기댄채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은 동만의 어깨가
안쓰럽게 떨리고 있다....
**
손가락이 쪼글쪼글해지도록 욕조에 몸을 뉘인채 생각에 빠져버렸던 정인은 또 동만에게 갖은 잔소리를 들으며 콩나물국으로
해장을 한다. 이렇게 잔뜩 찡그린 얼굴로 제 앞에 앉아있는것도.. 그러면서도 반찬은 죄 제 앞으로 밀어주는것도.. 그리고 이토록
지치지도 않고 잔소리를 해대는것 역시 저를 걱정해서 라는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것이 그가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툴기
때문이라는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동만의 표현이 자연스러워질까 겁이 난다. 만약 그렇게 되버린다면..
저는 동만에게조차 등을 돌려야할테고.. 그렇게 그에게도 상처를 주고 말테니까..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있으려니 손가락 사이에 걸쳐져있던 숟가락이 휙 달아나버린다.
숟가락을 빼앗은 동만은 정인의 밥그릇에서 밥을 반쯤 덜어내 국에다 푹 말아버리고는 다시 정인의 손에 숟가락을 단단히
쥐어준다.
"입맛 없어도 먹어. 그거라도 다 안먹으면 먹을때까지 못일어날줄 알아"
멍하니 국에 빠져버린 밥을 쳐다보던 정인은 부러 제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밥만 먹고 있는 동만을 향해 입술을 몇번 삐죽이다
자세를 고쳐 앉고는 억지로 국에 빠진 밥알들을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그렇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뱃속에서 느껴지는 허기 보다도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너무도 컸고..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그토록 커다란 구멍은 위장의 허기짐을 달래는것 따위는 잊게 만든다.
그런데도 동만은 참 무던히도 제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그마저도 없었다면 지금 여기까지 정인은
견딜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입안에 우겨넣은 밥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삼켜버린다.
"고마워.. "
"뭐가"
"그냥.. 내 걱정 해주는 사람 .. 너 밖에 없잖아.. "
"누나가 모르는거 뿐이야. 나 말고도 많아 누나 걱정하는 사람.."
"피이~ "
오늘따라 무뚝뚝한 동만의 대꾸가 왜 이렇게나 살갑게 느껴지는걸까.. 가득 차버린 눈물이 한방울 국그릇 안으로 빠져버렸다...
"밥먹으면서 울지마. 체한다"
"안울어 누가 울었다고 그래.."
"운다고 뭐라는거 아냐. 체할까봐 걱정되서 그러지.. 우는게 나쁜거 아니잖아.. "
"응.. 나쁜거 아니지.. 알아"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결국 숟가락을 놓아버린 정인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한번 흘러나온 감정은 멈추지 않고 흘러버려서 점점 더 커다란
물줄기를 만들어 버린다..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흐느낌 조차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입술을 깨무는 정인의 머리위로 동만의
손이 올려지고, 어린아이에게 하듯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가있어. 커피 만들어줄께..."
정인은 여전히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은채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동만은 정인의 눈물을 못본척.. 끝내 새어나오는 작은 흐느낌을 못들은척 돌아서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제가 돌아서자마자 도망치듯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며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다..
' 아무리 그래도 난 안되는거지..? 내가 아무리 누날 걱정한다고 해도.. 누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건 내가 아닌거지...?'
싱크대에 물을 틀고 몇개 되지도 않는 그릇들을 씻어내며 동만도 정인처럼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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