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 Love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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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는건지 아시잖아요. 부탁드릴께요. 그냥 저 혼자 하면 돼요. 네?"
"알아, 네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도 알고, 왜 그런지도 알아. 그래도 안돼! 그렇게 무조건 들이댄다고 될일이 아니라는거
너도 알잖아. 이번 사건 끝내고, 나도 좀 더 알아볼테니까 우선은"
"아뇨! 지금이 아니면 안돼요! 또 금방 꼬리를 감춰버릴거라구요.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바로 숨어버릴거란 말이에요.
그럼 두가지 같이 할게요. 이번 사건에서도 빠지지 않을게요. 대신 제가 따로 조사할 수 있게만 해주세요 네?"
"유정인! 왜 이렇게 무모하게 굴어?! 승산이 없다는거 모르겠어?! 네 말대로 유원국은 네가 딸이라고 봐주지 않을수도 있어.
그런 상황에 변변한 증거도 없이 뒤를 캐겠다고? 아니, 허락할 수 없어. 그렇게 알고 이번 사건에나 집중하도록해. 나가봐"
"민검사님!"
"같은얘기 반복하게 하지 말고 나가봐"
"하지만!.."
"유원국이 악인이기 때문에, 다른사람들을 짓밟고 죽여서 그 자리에 올랐으니까, 그 죄를 제대로 묻고, 합당한 댓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다는걸 확인하고 싶은게 아니었어? 지금 넌! 개인적인 복수심에 집착하고
있는걸로 밖에 보이지 않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원망스러운듯 저를 바라보는 정인을 애써 외면하며 태연은 등을 돌려버렸다.
잠시 아무소리도 없이 서있기만 하던 정인이 타박타박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태연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버린 정인을 붙잡기라도 할것처럼 벌떡 일어나 걸음을 떼던 태연은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 떨어진 몇개의
물방울들을 발견하고 와르르 무너지는 가슴을 추스리기위해 주먹을 꼭 쥔채 눈을 감아야했다.
'나는 왜 늘 너를 울리는걸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 웃게 만들지는 못해도 울리고 싶지는 않은데...'
힘없이 느릿한 걸음을 옮겨 블라인드가 꼼꼼히 내려진 유리벽 가까이로 가서 선 태연은 떨리는 손가락끝에 블라인드 자락을
걸어 들어올린채 낮게 한숨을 내쉬며 비어있는 정인의 자리를 바라본다.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야, 태연아 인마!' 하는 순범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태연은 여전히 블라인드 사이로 정인의 자리만
보고 있을 뿐이다.
"어휴...그럴걸 왜.. 아니다, 너라고 좋아서 그러는거 아닐텐데 말해 뭐하겠냐.. 유검 그 뭐냐, 피해자 다니던 학원.
거기 가본다고 나갔다. 바로 퇴근한다더라.."
순범이 나가고 또다시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가 앉은 태연은 책상위에 펼쳐진 사건 자료들에 집중하려 애썼다.
**
정인이 그렇게 나가버리고 어느새 밖은 어두워지고 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타이어자국을 분석한 화면, 몇개의 cctv 녹화영상 따위를 보여주며 동만이 열심히 떠드는 내용이 귓가에서
웅웅거리며 제대로 들리질 않아 잔뜩 인상을 찡그린 태연은 가슴앞으로 팔짱을 낀채 눈을 꾹 감았다 뜬다.
"민검 왜 그래? 어디 안좋아?"
순범의 걱정어린 질문에 고개를 저어보이곤 알아낸건 그게 다냐고 동만에게 재차 확인한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정인은.. 연락 없었어?"
"그게 .. 학원에서 피해자랑 가깝게 지낸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오늘 나오질 않았다고 집으로 찾아가보겠다 그러시던데요.."
"몇시쯤이야? 전화 온게"
"음..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된거 같은데요.."
"그 뒤론 연락 없었고?"
신경이 잔뜩 곤두선 태연의 말투에 잔뜩 주눅이 든 동만이 '네..' 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하자마자, 태연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정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끊기고, 사서함으로 넘어갈때까지도 정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이 어디라는 말은 없었어?"
"네? 네.. 그거까지는.."
"민검. 왜그래? 유검 전화 안받아? "
불안한 둘의 시선에 태연이 나지막히 한숨을 내쉰다.
"우선 퇴근들 해. 유정인한텐 내가 연락해볼테니까.. 아! 학원은 어디라고 했지?"
주섬주섬 책상위를 정리하던 동만이 재빨리 메모지에 학원 주소를 적어 건네고, 태연은 빼앗듯 메모를 낚아채 사무실을 나간다.
**
퇴근해야 한다는 원무과 직원을 반쯤 협박하다시피 해서 받아낸 주소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운전을 하는 내내 태연은 머릿속에
들어차는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노력해야했다.
계속해서 재다이얼을 눌러 전화를 걸지만 그를 반기는건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기계적인 음성뿐이다.
귀에 걸고 있던 블루투스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빼 조수석으로 던져버리고 목적지에 차를 세운 태연은 가파른 언덕길을 미친듯이
달려 올라갔다. 피해자의 학원친구가 산다는 옥탑방은 불이 꺼진채였고, 그곳 어디에서도 정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자꾸만 조급해지는데 할수 있는건 없다. 정인의 번호를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댄채로 뛰어올라왔던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달려내려가 차에 오른 태연은 아직도 사서함으로 넘어가버리는 무심한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무작정 정인의 집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빌라의 주차장을 확인하고, 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정인의 차는 보이질 않았다.
불이 꺼진 그녀의집 창문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좁은 빌라의 계단을 두개,세개씩 성큼성큼 뛰어올라가 초인종을 누른다.
몇번이나 계속해서 벨을 누르자니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는 가슴속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지는것 같았다.
두터운 철제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려도 보고, 큰소리로 정인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돌아오는건 빼꼼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옆집 사람의 따가운 눈총과 아래층 어디선가 들려오는 욕설 뿐이다.
빌라 아래서 하릴없이 정인을 기다리다 결국 태연은 맥없이 차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좀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기다리면.. 그래서 얼굴이라도 보면.. 그럼 뭐라고 할건데..? 무슨말을 할 수 있는데..? 나란 놈이 정인이한테 뭘 해줄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미칠듯이 화가나서 견디기가 힘들다. 목구멍에 뜨거운 무언가 걸려있는것 같은데 어떻게 해도 삼켜지질 않는다.
참지 못하고 창문을 내리자 제법 거세진 빗줄기가 차안으로 들이쳐 얼굴이며 재킷을 적셔오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차가움이
위안이 되는것 같다.
어느덧 태연의 차는 그의 집이 있는 주택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보면 정인의 집과 제 집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것도 아닌데.. 어쩌다 한번 저녁이라도 사먹일껄 그랬다 싶은 생각에
마음이 쓰리다.
혹시 하는 생각에 조수석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어들려던 태연은 그자리에 차를 세웠다.
우산도 없이 어둠속을 터덜터덜 걷던 가냘픈 인영이 희미한 가로등 아래 멈춰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있다.
빗속에 얼마나 그렇게 있었던건지 머리는 이미 다 젖어버렸고 축 늘어뜨린 어깨는 가엽게 떨리고 있었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한숨을 포옥 내쉬는 모습은 분명 그가 아는 그녀였다.
정인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태연은 그대로 차밖으로 뛰어나가 한달음에 정인에게로
달려갔다.
***
태연이 제 마음을 몰라주는것 같아 화가나고, 서러웠다. 적어도.. 적어도 그만은 제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를 바랬다.
알고 있다 그것이 욕심이라는것쯤은.. 그래도 자꾸만 그리로 흘러가는 실체도 없는 마음이란건 막을수도 붙잡을수도 없다.
그래서 더 애가타고, 그래서 더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이란것 조차도 그의 잘못은 아니니까.. 화를 낼 자격이 제게는 없다.
울어버린걸 들킬까 싶어 무작정 사무실을 나와버렸다. 해야할 일이 있고,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만...
지금 이런 기분으론 아무것도 할수가 없을것 같다. 괜히 죄없는 핸들을 팡팡 때리며 앙탈 아닌 앙탈을 부려대던 정인은
뜻하지 않게 클락션을 울려버리고 나서야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피해자가 다니던 디자인학원 사람들 모두 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긴 여긴 그들의 직장이고 배움터니까.. 자꾸만 자기들
시간을 뺏는걸 좋아할리가 없다. 그래도 사람이 그것도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고 배우던 사람이 죽었다는데 어쩜 이렇게들
무심한걸까.. 불쑥 짜증이 치솟아 입에서 고운말이 나가질 않는다.
동만에게 전화로 대충 상황설명을 해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민검사님은 어떠냐는 말을 힘들게 삼켜버리고 전화를 끊는다.
피해자 친구라는 사람의 옥탑방엔 불이 꺼져있어 물어보니 집주인 말로는 며칠전에 시골집에 내려갔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거니 이번엔 받는다.. 에효.. 좀 일찍 받던가..
결국 헛걸음만 하고 마음만큼 무거운 몸을 운전석 시트에 파묻고 있자니 뱃속에서 꼬륵꼬륵 먹을것 좀 넣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생각해보니 점심도 제대로 안먹었다. 기분도 이모양인데다 혼자 먹는 밥은 더더욱 싫어서 정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정인 인생 참 처량하네.. 같이 밥먹어줄 변변한 친구하나.. 애인하나 없고..
가끔 들르는 실내포차는 평일이라선지 사람이 별로 없다.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솔솔 풍기는 음식냄새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청승 떨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메뉴판을 콕콕 찝어가며 꼼장어에 닭꼬치, 우동까지 시켰다.
먼저 가져다주는 소주를 한잔 가득 따라 털어넣으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느낌에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소주 한병을 다 비우도록 잔뜩 시켜둔 안주에는 손도 안대는 정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아저씨가 소주병과 잔을들고
앞에와서 앉는다.
"오늘 음식이 맛이 없어요?"
"네? 아.. 아뇨.. 제 혓바닥이 오늘 제 구실을 못하나봐요.."
"한잔 받아요"
따라주는 소주를 받고 손을 내밀어 병을 받으려니 아저씨는 괜찮다며 직접 잔을 채운다.
"그래도 빈속에 술 많이 마시면 안좋으니까 그것만 마시고 일어나요. 오늘 손도 안댄 안주는 담번에 서비스해줄테니까.."
"안그러셔도 돼요.."
피식 웃으며 빈 소주잔을 내려놓자 아저씨는 닭꼬치 하나를 얼른 정인의 손에 쥐어준다.
"뭐 많이 속상한일 있나봐요.."
"후.. 좀 짜증나는 일이 있는데.. 괜히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를 해버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리네요.."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오래 끌면 결국 못하게 됩디다. 맘에 걸리면 속끓이지 말고 미안했다고 그래요. 그럼 되는거지 뭘"
"그럴까요..."
**
실내포차에서 나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데 있어야할 휴대폰이 잡히질 않는다. 아.. 차에다 두고 왔나보다..
하긴.. 전화올데도 없는데 뭘.. 하며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건데.. 하면서도 술기운인지 뭔지 발길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진다.
그래.. 조금 걷자.. 기껏 마신 술이 깰거 같긴 하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다..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어 걷기 시작한게 어느새 눈을 들어보니 그의 집 근처까지 와버렸다.
미련하고 바보같은 자신을 욕하면서도 정인의 발걸음은 태연의 집앞까지 이어졌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건지 기억도 나질 않는 빗줄기가 머리며 옷깃을 다 적시는데도 정인은 한참동안 태연의 집앞에 선채
그를 기다렸다.
술기운일지 몰라도 ...미안하다고.. 날 걱정해서 그러는거 알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너무 못나서 그래서 괜히 당신한테
화를 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외투가 다 젖도록 서서 불꺼진 태연의 집을 바라보던 정인은 힘없이 돌아섰다.
걷다가 돌아보기를 몇번이나 한걸까.. 가로등 아래 서서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던 정인은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어둠속에서 뻗어나온 손이 정인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우는가 싶더니 그대로 잡아당긴다. 당기는 힘에 누군가의 품안으로
스르륵 쓰러지듯 안겨버린 정인은 여전히 아무말도 못한채 굳어져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대체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거야 .."
"민..검사님..?"
제 뒷머리를 감싼 태연의 손끝이 떨리는게 그대로 전해져온다.
"전화는 왜 안받아.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머리위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정인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추위를 느꼈다.
"차에 두고 내렸나봐요.. 죄송해요.. "
태연은 말없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정인의 손을 이끌고 차에 태워 제 집으로 향했다.
태연이 이끄는대로 그에게 손목이 잡힌채 따라들어간 그의 집은 삭막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코트도 젖고, 아예 쫄딱 젖은 머리에선 자꾸 물이 떨어지는 통에 정인은 현관에 선채로 머뭇거리고 있다.
"안들어오고 뭐해"
"저기.. 젖어서.. 머리가.. 그러니까.. 그게.."
"상관 없으니까 들어와"
"그래도..."
태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커다란 타올을 가져다 정인의 머리위에 덮는다.
"이제 됐어?"
사실 젖어서 그런다는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정인은 젖은 코트를 벗어 입구에 걸어두고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쭈뼛거리며 수건으로 머리만 꾹꾹 쥐어짜고 있는 정인의 손목을 또 휙 낚아채듯 잡은 태연은 소파위에 정인을 앉히고, 옆에
게어져 있는 담요를 펼쳐 어깨에 둘러준다.
"밥은 먹고 술 마신거야?"
"네? 수,술냄새 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놀라는 정인의 반응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닦고 있던 태연은 피식 웃어버린다.
정인은 이럴때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유야 어찌됐든 오늘 두번이나 그에게 손목을 잡히고, 품에 안기기까지 해서
머리가 핑핑 돌것처럼 정신을 못차리겠는데.. 그게 저만 그렇다는걸 확인시켜주듯 태연은 너무나 느긋하니 말이다.
정인은 다시한번 제가 그를 기다린 이유를 머릿속에 상기시키며 어떻게든 기회를 엿봐 오늘 미안했다는 말만 하고
집에 가야겠다고 다짐 했다.
정인이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언제 가져왔는지 태연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 한잔을 앞에 놓아준다.
따뜻하고 달콤한 핫초코에 푹 빠져 저도 모르게 생글거리던 정인은 문득 태연의 시선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민검사님은 안드세요..?"
"난 됐어. 근데.. 혹시.. 날 기다린거야?"
"네? .. 아.. 그러니까.. 그게.. 아까 저녁때.. 제가 괜히 민검사님한테 화풀이를 해버린거 같아서요.. 일부러 그런건 아니구...
그냥 제가 좀 .. 음.. "
"괜찮아. 괜찮으니까 마음 쓸거 없어."
"그래도..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어떻게보면 그건 제 개인적인 일인데.. "
"나도 말이 좀 심했어. 미안해"
"아니에요.."
그의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게 왜 이렇게 가슴이 뭉클해지는건지 알수 없지만 정인은 순간 목이 메이고,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데.. 안타까운 표정으로 저를 보는 태연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자니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려고만 한다.
"그렇게 불쌍하게 보실거 까진 없어요.. 뭐.. 좀 많이 싫은 사람이 아버지인건 맞지만.. 어쩌면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그런 환경에서도 나름 잘 컸다고 자부하니까.. 그렇게 안됐다는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앞으로는 공,사 구분
더 확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죄송했어요. 그만 가볼께요. 잘 마셨습니다."
제 자신의 마음에 못을 박듯 정인은 부러 삐딱한 말만 골라 딱딱하고 차갑게 말하고 일어섰다.
눈가엔 아직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지만, 웃는 얼굴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전에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만으로 젖은 코트를 들고 현관에 서 신발을 신으려던 정인은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불쌍하다고 생각해본적 없어. 한번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려 등뒤에서 제 몸을 감싸안은 그의 손등위로 떨어졌다.
태연에게 돌려세워진 정인은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참아보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플정도로 양 어깨를 꽉 잡은 그의 모습이 낯설어 정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태연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등뒤에 차가운 벽을 느끼며 정인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는 태연의 입술사이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삼켜버릴것처럼 덮쳐온 그의 입술은 정인의 입술이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듯 머금고 빨아들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수없어 머뭇거리기만 하던 정인의 호흡이 흐트러지며 살포시 입술이 열리자 틈을 놓치지 않고 매끄러운 혀가 입속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한참이나 제것인양 그녀의 입안을 맛보던 태연은 정인이 더이상 숨을 쉬기 힘들어질때쯤 되어서야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네가 불쌍해서 이러는거 같아? 그래?"
스르륵 무너지려는 그녀를 받치고 선채 턱을 잡아 눈을 마주하고 묻는 태연의 흐트러진 목소리에 정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정인의 뺨을 감싼채 조심스레 손끝으로 눈물자욱을 지워낸 태연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품안으로 당겨 꼭 끌어안았다.
"생각 같아선 네가 원하는건 뭐든 해주고 싶어. 알아? 그게 복수든, 단죄든 그런건 상관 없어. 그래도 네가 다치는건 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뭘 하든 내 옆에서 해. 내가 널 지켜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란말이야. 그렇게 혼자 고민하지 마.
나 없는데서 술 마시지 말고, 혼자 비맞고 다니는 바보 같은 짓도 하지 말라구. 알아들어?"
"좋아해요.. "
동문서답 같은 그녀의 엉뚱한 대답에 태연은 낮게 한숨을 내쉰다.
"알아. 그래서 미칠거 같다. 나같은 놈 좋아해서 너한테 좋을게 하나도 없는데..."
"미안해요.."
울먹이는 정인을 바짝 당겨 안은 태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바보같긴.."
비밀을 가지고 사랑을 한다는건 어쩌면 두사람 모두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누구의 것이든 마음이란 제멋대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라 , 막을수도.. 붙잡을수도.. 되돌릴수는 더더욱 없다.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흘러왔고...
그렇게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다.
태연은 부디 제가 가진 비밀을 오래도록 지켜낼 수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그렇게라도.. 그녀를 속여서라도 그 사랑을 제 안에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일러스트 출처 : http://www.deviantart.com/art/Lover-335888660
http://www.deviantart.com/art/Rain-26911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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