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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L'amant/L'amant

기억

 

 

***

 

 

 

10. 고백

 

 

 

 

 

욕실에 숨어 세면대 가득 받아진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가 눈물을 씻어냈다.

눈물이 흐를새도 없이 정인은 그렇게 물속에서 울어버린다.

기억을 잃고.. 뻥 뚫린 가슴이 죽을것처럼 아팠어도 누구앞에서도 있는그대로 슬픔을 터뜨려본적 없는 정인은 여지껏

소리내어 울지 못했다. 가끔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어도 동만의 옷깃을 잡은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만다. 쏟아내지 못한 슬픔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이더라도 소리내어 울어버리면 무너질것 같았다..

점점 더 약해질것 같았다..  왜 이토록 아픈건지 알아내기도 전에 부서져버릴것 같아서 정인은 오늘도 흐느낌을 삼킨채

눈물만 흘려보냈다.

 

 

거울속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고,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괴로운 얼굴로 저를 마주보고 있다.

눈물의 흔적까지는 어쩌지 못하겠지만 계속 이런표정일순 없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웃어보지만.. 거울속 여자는 슬픈 표정으로 입가에 경련을 일으킨다.

 

"바보같아... "

 

작게 중얼거리며 거울위로 물을 흩뿌리자 거울속 그녀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버린다.

어쩌면 저것이 진짜 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정인은 피식 실소를 뱉어내며 돌아섰다.

 

 

욕실에서 나와 거실소파위에 쪼그리고 자리를 잡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가 제 몫으로 놓여진다.

큼직한 머그잔에서 뿜어져나오는 온기를 손바닥 가득 느끼며 부러 밝은척 가슴 가득 향긋한 커피내음을 들이마신다.

 

"넌 안마셔?"

 

"기분은 좀 괜찮아졌어?"

 

"뭐야.. 왜 동문서답인데"

 

"커피 좀 줄이려구.."

 

뭔가 이 어색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지만 정인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린 새카만 액체를 뚫어져라 들여다만 본다.

 

"3시쯤 올꺼야. 어제 누나 도와준 사람.."

 

"뭐?! 왜? 아니, 여기로? 집으로?"

 

당황스러운듯 정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만을 쳐다본다.

 

"새벽에 누나 여기까지 데려다 줬어. 내가 데려온거 아니야. 뭐 물론 문은 내가 열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함.. 아니, 불안이 아닌것 같다. 이건, 이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당장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치는것..

손끝에서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고,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려와서 정인은 얼른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위에 내려놓았다.

 

"도대체.. 누가 날 도와준건데.. 누군데 날 여기까지 데려왔다는거야.. 그냥..그냥 말해 동만아. 누군데 그게"

 

"누나가 직접 만나봐. 그럼 알거야. 그사람 아니었으면 누나 어제 무슨일 당했을지 몰라. 내가 도착했을땐 .. 이미 상황 끝났고,

 누난 기절한 상태였어. 그사람이 거기 없었으면 정말 .. 생각하기도 싫다.. "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니까? 너 알잖아. 아는거잖아. 왜 말을 안해주는데?"

 

동만은 낮게 한숨만 내쉴뿐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너 정말 뭔데?! 뭐하는건데?!"

 

곰곰히 지난 새벽의 일들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하던 정인은 결국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자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꽤 아픈 표정으로 그런 정인의 손을 살며시 잡은 동만은 고개를 숙인채 제 손에 잡힌 정인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누나.. 나는 .. 나는 말야.. 누나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감정이든 참지 말고 그냥 다 쏟아냈으면 좋겠어.   

 그래야 어떻게든 털고 일어날 수 있을텐데.. 그래야 누나가.. 아니, 유정인이라는 여자가 행복해질 수 있을텐데....

 근데.. 내 앞에선 안할거잖아.  나한텐 털어놓는것도 기대는것도 안할거잖아..  내가 지금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더

 다가가면 도망갈거 아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유정인이란 여잔 나한테 마음 안열어줄거 아니까.. 그러니까..."

 

"최...동만.. 너 왜그래..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러지마.. 그러지마 동만아.. "

 

정인은 겁이 났다. 지난 3년동안 그만이 정인이 붙들고, 매달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잔인한 욕심이지만

그건 그가 정인에게 마음을 달라고 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누나.. 누나가 왜 아무한테도 마음 주지 못하고, 다른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건지 알아? ...그건.. 누나 마음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어서야. 늘 어딘가 비어버린거 같고, 항상 뭔가 그립고, 아련하고 .. 가슴아프고.. 그거 전부다.. 그래서 그런거야.

 누구라도 만나서 그 꼭꼭 닫아걸고 있는 마음 좀 열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거잖아. 그러니까 조금 후에 올 그 사람이 누나한테

 낯설든 익숙하든 피하지 말고 만나봐. 다른건 다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러자 누나.."

 

"아냐, 그래서 그런거 아니야 난 기억도 안난다니까.. 난.. 난 그냥.. "

 

무언가 다른말을 찾아보려고 해도.. 동만에게나 제 자신에게나 희망이 될 수 있는 무엇이라도 찾아보려고 해도... 그런건 ..

처음부터 없었다. 희망이라는게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난 3년이 그토록 지옥같았을리 없다..

 

"떼쓰는거 아냐.. 지금까지 그랬던것처럼 난 누나 옆에 있을거야. 달라지는건 없어. 한순간이라도 누나가 불행하길 바라지 않아.

 그러니까.. 정말 원하는게 뭔지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봐. 피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지금까지 계속 도망쳐왔잖아.

 이제 그러지마. 그냥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면 되는거야. 다른건 생각하지말고, 행복해지면 되는거야. 알았지?"

 

정인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잇새에 눌린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꼭 깨물고 놓지 않았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여버리지만 제 양볼을 감싸 눈을 맞춘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선에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것 같아 입술을 달싹이던 정인은 때맞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정인을 뒤로하고, 동만은 거실 벽에 있는 모니터 앞으로 갔다. 화면에 비치는 태연의

모습을 확인하고 정인을 돌아보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현관문을 여는 버튼을 꾸욱 누르며 스스로 보기에도 가엽게 떨리는 손끝을

주먹안으로 감춘채 정인의 곁으로 와서 선다.

정인의 손이 제 재킷자락을 꼭 쥐는것을 느끼며 동만은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

 

 

 

 

11. 재회

 

 

 

 

 

 

동만의 전화를 받은 후로 태연은 그 답지 않게 허둥대고 있었다.

설레임과 두려움 따위가 뒤섞인 묘한 감정에 허덕이던 태연은 걱정이 그득한 순범의 한마디에 문득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만이 없었으면 유검 어찌 됐을지 모른다 태연아.. 그녀석..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이 동만의 이름을 강조하듯 말하는 순범의 본심은 무엇일까.. 불쑥 순범에겐 제 감정보다는 동만의 마음이 더 중요한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 쓴소리가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으며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내가 정인일 만나지 않으면 형.. 그럼 그 둘이 행복해질까..? 형 생각은 어때... 그럴 수 있을까..."

 

순범은 이마를 짚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다말고 깊은 한숨을 내쉰 순범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다고..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이기적인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더라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그대로 묻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동만의 마음이 깊어지는걸 지켜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루가 다르게 제가 설곳은 좁혀지고 있었고

그 자리를 동만이 채워가는걸 묵인하기엔 정인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컸다.

 

"어차피 난 정인이한테 나쁜놈이잖아.. 욕심내는것 자체가 죄악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죽은걸로 알려진 목숨에 미련 같은건

 없다고 생각했어. 정인이나 형이.. 최동만이 ..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더이상 나로인해 위험해질 일만 없게 되면.. 그대로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정인이가.. 나한테 보여주던 웃음이.. 유정인이란 여자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보여주던 수많은 표정들이... 너무 또렷해서 .. 죽고싶지가 않았어...     그러니까 형.. 마지막이라고 생각할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   한번만 더 욕심내면 안될까...."

 

 

먹먹하게 잠겨드는 태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순범은 눈가를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에도 태연은 한참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녀석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순범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었고, 정인을 보며 천진하게 웃던 동만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을 어지럽혔다.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만들면서까지 제 욕심을 채우고서 ..그런 마음으로 정인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건 지나친 자만이고 이기심일 뿐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덧대어져 결론과는 점점 더 멀어져 버리고 있었다. 태연은 잡다한 생각들을 털어내려 애썼고,

지금은 오직 정인과 제 자신만을 생각하면 되는거라는 억지스러운 결론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5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문밖으로 발을 내딛는 사소한 몸짓 하나조차 태연에겐 쉽지 않았다. 

이를 악문채 미간을 잔뜩 찡그린 얼굴엔 가슴속에 들어찬 고뇌가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꽉 쥐어진 주먹을 펴 닫기려는 문틈새로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연은 낮게 한숨을 뱉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정인의 집 문앞에 선채로 또 그렇게 망설이던 태연은 한참만에야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말 없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리는 현관의 손잡이를 잡은채 태연은 몇번이나 도움도 되지 않는 심호흡을 하고있다.

 

 

 

 

**

 

 

 

 

문을 열어주고, 정인의 곁으로 와서 선 동만은 정인이 제 재킷 끝자락을 꼭 쥐는걸 느끼며 한편으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어쩌면 그녀의 선택이 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아직은 놓고 싶지 않았다.

 

 

한손으로 매달리듯 동만의 재킷자락을 꽉 틀어쥔채 제멋대로 뛰어대는 심장을 따라 자꾸만 빨라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던 정인의 눈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정색 바지에 짙은회색 터틀넥을 입고, 카멜브라운 모직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올수록 정인의 심장은

미친듯이 뛰어댔고, 호흡은 점점 더 빨라진다. 사진속에서 보았던 모습보다 조금 야위었고, 머리스타일이 바뀌었지만 분명

그였다. 밤낮으로 들여다보던 사진속의 그.. 기억해내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남자..

 

울컥 눈물이 차올라서 시야를 흐렸다. 그를 기억하기 때문에 우는건 아니었다. 다만.. 사진속의 민태연이 몹시도 낯설었다면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는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온 몸을 녹아내리게 할것처럼 따스했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껏 제가 그리워해오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이미 그녀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채워지고 흘러내리길 반복하는 눈물은 멈출줄 모르고 샘솟는다. 어째선지 손끝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잡고있던 동만의 옷자락도

스르륵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버린다. 가슴이 너무 아픈데.. 한편으론 기뻤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휘둘리며, 정인은 자꾸만

두근대는 가슴에 손을 얹은채로 태연을 올려다 봤다.

 

 

 

 

 

 

저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하는 정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태연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인에게 다가갔다.

저를 보고 무서워하면 어쩌나.. 혹시라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어쩌나.. 그래서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까..

가슴이 쓰리도록  자신을 괴롭히던 걱정들은 지금 이자리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그저 정인의 눈물이 안타깝고

이렇게라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것이 감사하고 기쁠 따름이다.

 

정인의 앞에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작은 얼굴을 감싼다. 제것이 아닌것마냥 떨리는 엄지로 살며시 젖은

그녀의 눈가를 쓸어본다. 금새 다시 차오른 눈물이 손가락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나 알겠어..?"

 

손바닥 안에서 정인의 얼굴이 작게 끄덕여진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이 좋았고, 저를 알아봐주는 그녀가 고맙다.

 

"기억 난거야..?"

 

여전히 눈물을 쏟아내며 도리질을 친다.

 

"사진.. 사진에서 봤어요.. "

 

그럴거라고 예상했음에도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것처럼 아픈건 어쩔 수가 없다.

쓸쓸하게 미소를 지은채 '그래..' 하고 대답하자, 무엇이 불안한건지 양손으로 제 코트깃을 꼭 쥔채 잡아당긴다.

 

"미안.. 해요.. 나.. 기억이 .. 안나요.. 그치만.. 알것 같아.. 나.. 그쪽이 보고싶었나봐요.. 내 마음이.. 기억하는게.. 그게..

 그쪽인거 같아.. 그런거 같아요.."

 

 

점점더 심해지는 울먹임에 숨을 몰아쉬며 쏟아내는 정인의 목소리에 태연은 등골이 찌릿해질만큼 기뻤다.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면서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궈내고는 정인은 여전히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금새 가슴을 가득채워 숨을 쉬는것조차도 쉽지 않을만큼 벅찼다.

 

가만히 정인의 뒷머리를 감싸 가슴으로 당겨 품에 안는다. 그리웠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자 참았던 눈물이 끝내 비집고 나온다.

 

"너무 오래 떠나있어서 미안하다.. 조금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해.."

 

태연의 미안하다는 말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정인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 없어.. 이제부터 채워줄께.. 잃어버린것 보다 더 많이 채워줄께.. 약속할게.."

 

그의 코트깃을 잡았던 손을 풀어 태연의 등을 감싸 안은채 정인은 지난 3년동안 쌓아두었던 슬픔을 엉엉 소리내어 풀어내고 있다.

 

 

 

 

 

**

 

 

 

 

자신의 재킷을 말아쥐었던 정인의 손이 스르륵 풀리는걸 느꼈을때 알아버렸다.

그녀의 마음속엔 이미 정해진 답이 있었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두사람의 모습이 점점더 멀게 느껴지는 순간 동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러면서도 쉬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건 혹시라도 갑작스레 정인의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을지..

한꺼번에 돌아오는 기억이 그녀를 힘들게 하는건 아닐지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소리내어 우는것을 듣는순간 그따위 걱정들이 다 부질 없는 것임을 꺠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녀를 걱정한게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제 마음 때문인지도 ..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정인의 마음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고.. 예상대로 그녀의 마음은 태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그녀가 행복해지면 그걸로 다행인거라고.. 처음부터 욕심은 없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관앞에 선 동만은

그럼에도 다시한번 돌아볼 수 밖에 없다.

마음을 꺼내 두고 가는것이 가능하다면 좋을텐데.. 라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며 느릿느릿 신발에 발을 꿰어 넣는다.

정인의 집을 빠져나오며 동만은 피식 제 자신을 비웃었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지만.. 적어도 저는 기억을 잃어버린건 아니지 않나 ..멍청한 생각을 하며 열려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인다.  주차장에 도착할때까지도 방금까지 겪었던 일의 주인공이 제가 아닌것같은 멍한 얼굴이던 동만은 운전석에 앉아

키를 꽂아넣고 나서야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에 놀랐다. 그렇게 동만은 한참을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

 

 

 

 

12. 기억을 채우다

 

 

 

 

 

 

두사람이 다시 만나고, 정인은 다시한번 태연에게 빠져들었다.

 

춥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정인을 닮은 벚꽃이 만개한 봄날의 어느 새벽 태연의 품에 안긴채 잠에서 깬 정인은

그날의 일들을 기억해냈다.

 

그와 그녀가 죽음과 마주했던 그날 단 몇시간의 기억만을.

 

 

 

 

정인은 태연의 품에 안긴채로 덤덤하게 말한다.

 

"내가 왜 당신을 짝사랑만 해야 했는지 알았어요.. "

 

"무슨소리야?"

 

"태연씨가 날 싫어했다고 생각했어요. 나혼자 짝사랑을 했구나.. 뭐..아무도 말을 안해줬으니까.. 근데 기억이 없어도

 내가 힘들어하는건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라는데.. 아무도 우리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는 말을 안해주는거에요.

 아니, 오히려 다들 피하고.. 그래서 난 당신이 날 싫어했나보다.. 그렇게 어렴풋이 생각했거든요.."

 

"그건.."

 

"근데 이제 기억났어요."

 

기억이 났다는 말에 안고있던 팔을 풀고 일어나려는 태연의 품안으로 정인은 더 깊이 파고들며 꼭 끌어안는다.

 

"다는 아니고.. 그날.. 내가 납치되고.. 당신이 날 구하려고 왔던 거.. 그리고..당신이.. 나한테 숨겨야했던게 뭔지.."

 

태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는걸 느낀 정인은 더더욱 꼭 그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어간다.

 

"혹시..내가.. 모르길 바랬어요?.. "

 

"내가.. 무섭지 않아..? "

 

"당신이?.. 아니.. 하나도.. 내가 말하고 싶은건.. 당신이 날 싫어했던게 아니라서 기쁘다는거에요.. 혹시...

 도망가버릴거에요? 내가 알아버려서...?"

 

품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물기어린 눈동자를 마주하자 태연은 가슴속에서 뜨겁게 무언가 소용돌이 치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힘껏 정인을 끌어안고 머리에 이마에 입술에 수없이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니, 아무데도 안가. 이제 도망치지 않아. 사랑해.. 사랑해 정인아..

 

 

 

 

 

 

**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이 되고..태연과 정인은 이사를 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주택으로 두사람의 짐이 옮겨졌다.

 

 

 

"여어~ 집은 합쳤는데 국수는 언제 먹여줄건가~?"

 

거의 정리가 끝나갈 무렵 들이닥친 순범이 대뜸 국수타령을 하며 두사람을 향해 손을 흔든다.

이렇게 농담처럼 정곡을 찌르는 순범의 진담에 때마다 얼굴을 붉히곤 하던 정인도 이제는 제법 적응이 된것인지

'그러게 말이에요' 하고 맞받아친다.

 

"왜? 저녀석이 면사포 안씌워준데? 그냥 얼렁뚱땅 같이 살쟤?  그런거면 혼구멍을 내줘야지!"

 

과장된 표정으로 팔을 걷어붙이는 순범의 앞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정인의 어깨를 감싼 태연이 잠깐 쉬자며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꾸욱 눌렀다 뗀다. 그런 그의 애정표현에는 도저히 적응이라는게 안되는 정인은 금새 양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팔꿈치로

태연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껄껄 웃으며 쨔식이 이제 아주 대놓고 염장질이라고 태연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친 순범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두사람 사이로

끼어든다.

 

 

"동만이는..   안온데요..?"

 

다소 풀죽은 정인의 물음에 순범이 흠흠 헛기침을 한다.

 

"그 쬐끄만 자식이 바쁘다고 튕기잖아. 뭐 나중에 집들이하면 온대나 어쩐대나.. 아우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갑시다 밥!"

 

 

동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런데도 자신은 이렇게나 행복해도 좋은건가 싶어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는건 태연도 마찬가지라

늘어뜨린 정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웃어보이는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자고로 이사한 날은 자장면을 먹어야 한다고 우기는 순범의 말에 가끔 가는 중식당의 룸에 둘러앉은 세사람이 막 메뉴를 고르고

있을때였다. 지잉거리며 울어대는 휴대폰을 꺼낸 태연이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는다.

 

'어, 그래. 괜찮아. 아니야, 알았어, 고마워' 등의 간단한 대답 몇마디를 하던 태연이 불쑥 정인에게 휴대폰을 건넨다.

 

"누군데요?"

 

"받아봐"

 

액정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태연은 휴대폰을 정인의 귓가로 바짝 가져다 대준다.

 

"여보세요?"

 

'누나... 나야.. 오랜만이다 그치?.. 그동안 연락 자주 못해서 미안.. '

 

동그랗게 커졌던 눈망울이 살짝 흔들리며 정인은 버릇처럼 입술을 깨문다.

 

"아냐.. 괜찮아.."

 

'황형사님한테 누나 이사한다고 들었는데.. 못가서 미안해. 요즘 사건이 많아서 분석실에 일이 밀렸어.. 우리팀 전부 이번 주말

 반납했거든.. 누나 듣고 있어?'

 

"으응.. 듣고 있어.. 그렇게 바빠서 어떡해..?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 가려구. 그보다 오늘 못갔으니까 다음주 주말에 저녁이나 같이 하자. 태..연..형도 같이.. 괜찮지?..'

 

동만에게서 어색하게 흘러나오는 태연형이란 단어에 정인의 입에선 푸흐 하고 웃음이 먼저 나와버렸다.

 

'뭐야 왜 웃어!'

 

"아냐, 그냥 좀 어색해서.. 알았어 다음주에 보자. 시간 정해서 다시 전화줘. 기다릴게."

 

전화기 저쪽에서 푸흐흐 따라웃는 소리와 알았다며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는 동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바빠도 밥 거르지말고.. 꼭 전화해.. 보고싶다.."

 

'응.. 알았어..'

 

"그래.. 얼른 가서 밥 먹어 그럼"

 

'응.. 저기 누나!'

 

전화를 끊으려다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어' 하고 대답하니 좀전보다 가라앉은 동만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나.. 행복한거지?'

 

질문에 담긴 온갖 의미가 한꺼번에 가슴속으로 훅 밀려들어왔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웃으며 대답한다.

 

"응. 행복해."

 

'그래.. 그럼 됐어. 다음주에 봐. 끊을게'

 

 

귓가에서 딸칵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더이상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정인은 한참 전화기를 귀에 댄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 설명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힘들만큼 벅찬 감정들이 마음을 울려대서, 슬픈게 아닌대도 자꾸만 눈물이 날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만에 고개를 들었을때 순범은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린채였고, 태연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듯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잃어버린 정인의 기억이 모두 돌아오진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런건 상관 없다.

 

과거의 어떤 기억보다도 행복한 추억들이 두사람의 기억을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있으니까.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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