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만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Bar에는 평일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여러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만이 가게안을 빙 둘러보고는 비어있는 구석자리를 가리키며 먼저 걸음을 뗀다.
딴에는 남자라고 정인에게 먼저 자리를 권한 동만이 평소 버릇대로 그 옆에 앉으려다 순범의 손에 뒷덜미를
잡혔다.
"인마! 니 자리는 거기가 아니지~!"
'어?' 하고는 고개를 든 동만의 눈에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고는 꽤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는 태연이
보이자, 잽싸게 순범의 팔을 붙들고 그 뒤에 숨어버린다.
분위기 파악 좀 제대로 하라는 순범의 잔소리가 들리고, 나름의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동만은 등을
세차게 후려치는 순범의 손바닥을 느끼며 그 옆에 엉덩이를 붙여야했다.
자리에 앉아 손이 닿지 않는 등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아픔을 어쩌지 못해 몸을 배배 꼬아대는 동만의 모습에
정인이 푸흣~ 하고 웃어버렸다.
"너무 뭐라 그러지 마세요. 여지껏 쭈~욱 동만이랑 저랑 나란히 앉았었잖아요. 버릇 될만도 하죠 뭐... ㅇ,아닌가..?.."
괜히 저때문인것 같아 슬쩍 동만의 편을 들어주던 정인은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빤히 내려다보는 태연의 찌르는듯한 눈빛에 얼른 앞에 놓인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가볍게 맥주나 마시자던 처음 얘기와는 다르게 테이블엔 빈 맥주병들과 이미 반도 넘게 비어버린 큼직한 보드카병이 있다.
역시 오늘도 멀쩡한 사람은 태연 혼자 뿐인듯 하다.
순범은 동만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뭔가 열심히 설교중인듯 보이고, 정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양 볼을 톡톡 두드리다
곁에 앉은 태연을 올려다본다.
"민검사님은 술도 안마시는데.. 지루하시죠?.."
"괜찮아"
태연의 얼굴에 번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애정어린 손길... 낮은 음성.. 그만의 체취...
모든것이 정인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취한듯 멍하게 올려다보는 정인을 향해 빙긋 생각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정인의 입술위로
태연의 입술이 닿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짧은 입맞춤.. 놀라 크게 뜬 두눈을 깜빡이던 정인이 잊고 있던 두사람이 생각난듯 홱~ 고개를 돌려
순범과 동만을 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쉰 정인은 태연을 향해 눈을 흘긴다.
다행히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는 자기들의 얘기에 빠져 이쪽에서 일어나는 일엔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은것 같았지만
정인은 자꾸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어떻게든 해야겠단 생각에 태연을 향해 눈을 흘기던걸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화장실 좀...."
"같이 가줄까?"
꼭 쥐어진 정인의 주먹이 태연의 어깨를 때린다.
"자꾸 놀릴거에요?!"
빙글빙글 웃으며 어깨를 때리는 자그마한 주먹을 잡은 태연은 정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 작은 주먹을 펴 손등에 입을 맞춘다.
"다녀와"
말로는 다녀오라면서 태연은 여전히 정인의 손을 잡은채 놓지 않는다.
정인이 피식 웃으며 '가지말까요?' 하자 태연이 정인을 따라 웃으며 아쉬운듯 잡고있던 정인의 손을 놓아준다.
1층에 위치한 화장실로 가기위해 유리문을 열고 좁은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태연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느낌에 부끄러운듯 양손의 집게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잡아내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나란히 보이는 두개의 문엔 각각 남여 화장실을 알려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왼편의 여성용 화장실로 들어간 정인이 문을 닫으려다 누군가에게 휙 밀쳐져 몇발짝 뒷걸음질 쳤다.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잠기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정인은 눈앞에 선 검은 그림자를 보며 숨을 삼켜야했다.
"민태연이랑 같이 사는거야? 이런, 이런.. 한집에서 동거라... 결혼도 안한 남녀가 그래도 되는거야?"
비릿한 웃음을 매단 엘의 얼굴에서 정인이 읽을 수 있는거라곤 감당하기 어려운 비웃음 따위였고, 굳어진 정인의 표정은 이제는
그야말로 악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민태연한테 가면 다 벗어날줄 알았어? 그래서 그자식한테로 도망친건가?"
엘은 무섭게 노려보며 한발짝 다가왔지만, 정인은 그의 눈을 피하지도, 더이상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정말 .. 날 .. 죽일 생각은 있는거야?"
정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도 떨리지도 않고, 오히려 어느때보다 차분했다.
제 눈을 피하지 않는데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삐딱하게 묻는 정인의 질문에 오히려 엘은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날 죽일 생각이라면 그냥 빨리 죽여! 이제.. 더 이상 무섭지도 않으니까."
굳어졌던 엘의 표정이 풀리며 마치 정인을 비웃듯 입꼬리를 비튼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지. 네가 걱정하는게 네 목숨이 아니라는걸 내가 모를꺼라고 생각해? 네 죽음을 민태연 그 자식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재밌겠는데. 안그래? 유정인검사님."
엘의 입에서 태연의 이름이 나오자 정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이상 무엇을 물어야 할지, 힘으로는 물론 말로도 그를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태연에게 정인이 그렇듯 정인에게 민태연이란 이름은 외면할 수 없는 약점이었다.
정인이 더이상 아무말 없이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자, 엘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민태연을 돕고싶어? 그럼 민태연을 버려. 그자식을 배신하고 떠나서 나한테 와. 그러면 그자식 동생이 어디있는지 알려줄테니까.
어때? 솔깃한 제안이잖아? 안그래?"
"미친 자식.. "
꼭 쥐어진 정인의 주먹이 분에 못이겨 부르르 떨린다. 죽일듯이 엘을 노려보며 정작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인의 마음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다만 그렇게 약해지는 마음을 마주 서있는 이 비열한 남자가 알아채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바램따위 헛되다고 말하듯 싱긋 웃어보인 엘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태연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차가운 엘의 손끝이 턱끝에 닿았지만 어째선지 정인은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대답은 지금 안해도 돼. 잘 생각해봐. 어느쪽이 민태연을 위하는 일인지. 그럼, 다음에 보자구"
다가왔던 만큼 빠르게 엘은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겨진 정인은 휘청이며 세면대에 몸을 기댔다.
엘의 말이 어느 하나 틀리지 않다는 사실이 정인을 지독히도 괴롭히고 있었다.
술기운과 행복감에 젖어 붉게 물들었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다. 거울에 비친 정인의 눈가에서 끝내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바보같다.. 정말..."
중얼거린 정인은 차가운 물에 눈물을 씻어냈다. 거울속에 비친 제 얼굴은 아직도 두려움과 걱정에 짓눌려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물기가 남아있는 양 손으로 볼을 두드리고는 애써 웃음을 연습했다.
그래.. 지금 당장은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태연을 걱정시키느니 거짓으로라도 웃는 얼굴로 그를 보자...
"그래.. 웃어.. 웃는거야.."
최면을 걸듯 거울속 제 얼굴을 향해 중얼거린 정인은 손끝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며 마음을 죄어오는 두려움도 함께 털어내려 노력했다.
'Bloody L'amant > Blood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1 (0) | 2013.12.31 |
---|---|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0 (0) | 2013.12.31 |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8 (0) | 2013.12.31 |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7 (0) | 2013.12.31 |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6 (0) | 2013.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