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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0

 

***

 

 

 

거울속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향해 힘껏 입꼬리를 당겨 웃어보인 정인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은 물기를 닦아냈다.

 

줄곧 손수건 같은건 가지고 다니지 않던 정인이 매일 아침 꼬박꼬박 잘 다려져 곱게 접힌 손수건을 챙기게 된데는 꽤 아픈

사연이 있었다. 물론 그 아픔이란것 역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긴 했지만 정인은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심장부근이

욱신거리곤 했다.

 

 

 

박혜리.. 태연의 인생 어디에도 동생인 연지를 제외하고는 여자는 없을줄 알았던 정인에게 그녀의 등장은 갑작스레 눈앞의 

땅이 꺼져버려 아무 준비도 없이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리는 기분을 겪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게 해주었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던 정인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혜리를 감싸고 도는 태연의 태도에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배신감을 느꼈고 그것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정인의 마음을 조각내었다.

 

그래서 그에게 상처가 될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픈 말들을 던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정인은 칼날같은 말들을 입밖으로 내던 그 순간 조차 태연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 믿었고, 그를 향한 제 마음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거라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건 그나마 남아있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나보다. 질투에 눈이멀어 줄곧

가시돋힌 시선으로 혜리를 쏘아보았으면서도 절대 질투 때문은 아니라고 바보같이 제 자신 조차 속였었나보다.

 

문득 또 그때를 떠올리니 이제는 지병이 되어버린 아릿한 통증이 심장에서 시작해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아프게 만든다.

 

태연에게 달려와 안기던 혜리의 모습, 그런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던 태연의 모습이 준 아픔은 그의 손에 감긴 스카프를 

보는 순간 상처에 소금을 뿌린듯 쓰리게 아파와 정인의 마음을 온통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만약 그의 곁에 자신이 있었다면.. 그녀가 해준것처럼 상처를 감싸줄 스카프한장, 아니 피를 닦아줄 손수건 한장도 없는 제 

빈손을 내려다보며 정인은 태연의 곁에 필요한건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날밤 내내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분주하게 출근준비를 서두르던 정인의 시선이 화장대 위에 꺼내둔 하얀 손수건에 한참을 머물렀다.

그날부터 매일.. 깨끗하게 다림질된 손수건은 정인의 가방 한켠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때 결심했다.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든.. 저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더이상 무엇도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을 하겠노라고..

 

물기 먹은 손수건을 펼쳐 그날의 기억들과 함께 탁탁 털어낸다.

그 아팠던 기억들에 묻혀 엘의 협박따윈 저 멀리 날아가버리기라도 한듯 자꾸만 피식피식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때.. 얼마나 엉뚱한 상상들을 했던지.. 얼마나 어리석은 오해들로 스스로를 상처입혔던지.. 

 

 

 

"유정인"

 

막 1층으로 계단을 내려선 정인의 앞에 언제 왔는지 태연이 표정을 찡그리며 서있다.

 

"어? 왜 나와계세요?"

 

"대체 화장실에서 뭘 한거야?"

 

"네?. 아니.. 뭐.. 그거야.. 그러니까.."

 

머릿속을 꿰뚫어 볼것만 같은 태연의 눈빛에 왠지 그는 제가 누굴 만났는지도 다 알것만 같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생각이란걸 

알고 있지만, 정인은 자꾸만 태연의 눈을 피하게 된다.

 

"무슨일 생긴건가 걱정했잖아."

 

답지않게 당황해 버벅거리는 정인이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지극히 개인적인 볼일을 보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태연의 목소리가 한풀 누그러든다.

어째선지 이번엔 태연이 자꾸 제 눈을 피한다고 느끼는 정인이 슬쩍 다가가 태연의 팔에 제 팔을 꿰어넣는다.

 

"죄송해요. 얼굴이 너무 빨간거 같아서 찬물세수도 좀 하고 그러느라구요.. 그렇게 오래 있었나?.. "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인의 얼굴에 붙은 젖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태연이 피식 웃어버린다.

 

"왜요?"

 

왜 웃느냐 물어오는 말간 눈동자에 방금 제 머릿속을 스쳤던 생각을 말했다간 어쩐지 평생 잡혀 살것 같아 태연은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한다. 

 

"어~? 뭐지? 뭐에요? 왜 웃은건데요? 어? 막 눈도 피하네? 왜 웃었어요?"

 

"난 웃지도 못해? "

 

"피이~ 그냥 웃은게 아닌거 같으니까 그러죠. 수상해 정말"

 

"수상할것도 많다. 이뻐서 웃었어. 이뻐서"

 

"피이~ 그건 아닌거 같지만. 뭐.. 알았어요. 넘어가요"

 

낯부끄런 말은 제가 한것 같은데 되려 정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걸 보며 태연은 그냥 말해줄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 이제 네가 눈앞에 안보이면 내가 불안하거든.. 한시도 떼놓고 싶지 않아서 일도 손에 안잡히거든..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정인은 창밖에 시선을 내어준채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따금 태연을 흘끔거리며 훔쳐본다.

그런 정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리도 없고, 잠든것도 아니면서 이렇게나 오래 조용할 그녀가 아니라는것 또한

알고 있는 태연이었지만, 왠지 그 역시 쉽사리 말문이 열리질 않아 침묵의 무게가 더해간다.

결국 그대로 한마디도 없이 집앞에 도착하고 태연이 먼저 차에서 내릴때까지 정인은 고개를 푹 숙인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온 정인이 무안함에 배시시 웃어보인다.

 

"피곤하지? 어서 들어가자"

 

아무것도 묻지 않아주는 태연의 배려가 고마운 마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에 매달리듯 기대었다.

 

"대체 누구 애인이 이렇게 멋진거에요?"

 

장난스런 정인의 말에 무거웠던 태연의 마음이 조금 그 무게를 덜어냈다.

 

 

 

 

 

"그럼, 주무세요. 저도 얼른 씻고 자야겠어요."

 

집안에 들어오자 마자 정인은 도망치듯 제 방으로 몸을 돌린다.

태연에게서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것이 조금은 불안했지만 정인은 꿋꿋하게 방문 앞으로 가 손잡이를 잡았다.

 

"정인아.."

 

어깨에 올려지는 커다란 손이 정인을 돌려세웠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개를 떨군 정인의 머리위로 걱정이 담긴 

나지막한 한숨소리만 들릴뿐..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는 태연은 부드러운 손길로 정인을 당겨 안았다.

 

"내가.. 별로 믿음직한 애인이 아닌가보네.. "

 

품안에서 고개를 들어 무언가 변명 하려는 정인의 뒷머리를 감싼 태연이 조심스레 정인의 머리를 제 가슴에 기대게 한 후

어느때보다 따스한 손길로 정인을 다독였다.

 

"내가 더.. 더 많이 노력할게.. 별로 미덥지 않더라도 정인아.. 혼자서만 힘들어하지는 마라. 지금 당장 말하고 싶지 않으면 

강요하진 않을게.  하지만, 나중에라도 언제든 얘기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서 도울테니까.. 약속할테니까...

그래줄 수 있을까?.."

 

울컥 눈물이 차오를것 같아.. 정인은 팔을 들어 태연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그의 품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못미더워서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별거 아니라서.. 그래서 .. 아니, 나중에.. 조금만 더 있다가.. 얘기 할게요..꼭.."

 

"그래.. "

 

어쩌면 지금 바로 그녀를 괴롭히는 고민이 무언지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어쩐지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저로 인해 정인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아서.. 태연은 애써 웃어보였다.

 

정인의 이마에 한참동안 입을 맞추며 태연은 자꾸만 저를 흔드는 불안한 마음을 눌러보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