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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가 내려진 집무실에 앉아 태연이 세개의 혈액샘플을 노려보고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혈액샘플 중 하나를 집어 입안으로 털어넣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천으로 가려진 눈앞은 캄캄하기만 하다.
아무것도 볼수 없었지만, 이어지는 고통의 강도는 언제나처럼 끔찍하다.
태연이 책상위로 엎어지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남은 두개의 혈액샘플을 바라보는 태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럼에도 그중 다른 하나의 혈액을 집어드는 태연....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참기 힘든 고통에 힘겨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태연은 끝내 마지막 하나의 혈액샘플까지 확인하고야 만다.
세 사람 모두 죽음을 맞던 순간 검은천 같은 것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때문에 태연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안았다.
태연이 의자 깊숙히 몸을 묻고 눈을 감는다. 거친 호흡을 천천히 가라앉히고.. 잠시후 눈을 뜬 태연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사실.. 피해자의 혈액으로 무엇이라도 단서가 될것을 찾을 수 있다면, 정인을 사건에 끌어들이지 않고 싶었다.
태연의 마음이 그렇기에 끔찍한 고통에도 피해자 세명의 혈액샘플을 모두 확인했던 것이다.
단서를 잡게 되면 굳이 프로파일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는데.. 참.. 생각대로 되는게 없는것 같아 씁쓸하다.
이재하 그사람을 합류시키면서 정인에게는 빠지라고 한다면 어떨까...
"유정인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리가 없겠지.. ..."
태연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태연이 집무실에서 나오자, 자리에 앉아있던 순범이 벌떡 일어나며 마치 자신이 아프기라도 한듯 잔뜩 우그러진 얼굴로 태연에게 다가온다.
동만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어때? 뭐 좀 보여?"
태연이 고개를 가로젓는걸 본 순범이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눈을 가려놔서 아무것도 .."
"아.. 거참 어렵네, 어려워."
"형, 동만이랑 회의실로 와"
"어? 벌써 회의하게? 아직 부검보고서도 도착 안했는데 그냥 내일하지? "
태연이 대답 없이 지나쳐 회의실로 들어가버리자, 순범이 입을 삐죽이며 동만을 부른다.
회의실에 모여앉은 세남자.
순범과 동만은 무슨일인가 잔뜩 궁굼한 얼굴로 태연만 보고 있고, 태연은 그런 둘을 보며 다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다.
"이번 사건에 프로파일러 두명이 합류하게 될거야. 상부 지시니까 이렇다 저렇다 토 달지들 말고, 내일 두사람 오면 불편하지 않게 대해줘"
"뭔 파일러? 아니! 갑자기 무슨 자다 봉창 뜯는 소리냐? 어?! 사건 넘어온지 하루도 안됐구만 벌써 쪼는거야?!
아놔 진짜 드러워서 못해먹겠구만!"
순범이 특유의 씩씩대는 황소같은 표정으로 책상을 내려친다.
"우리쪽으로 넘어오기 전부터 그렇게 결정이 났던거니까 쓸데없이 기운빼지마"
"그래? 아니 뭐 그런거면 또 얘기가 다르긴 하지만.."
태연의 말에 또 금새 꼬리를 내리는 순범이다.
"아유, 그러게 황형사님은 왜 끝까지 말을 듣지도 않고 아무튼 너무 급하시다니까요"
옆에서 생글거리며 거들던 동만은 결국 순범에게 헤드락을 당하고 만다.
웃는 얼굴로 그런 두사람을 바라보던 태연은 곧 몇년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던 정인의 모습이 떠오른듯 표정이 굳어진다.
'저 두사람은 정인이를 어떻게 맞아줄까...'
둘에게 미리 얘기를 해야하는지를 고민하던 태연은 정인이 원하는대로 그녀에게 맡기기로 한다.
***
다음날 특검팀 회의실.
"이거 이거 아주 미친새끼다 태연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한테 이런짓을 할수가 있어. 그나저나 어쩌자고 이렇게 깨끗한건지,
아~~무것도 없어요 아주! 돌겠다 정말"
순범이 답답하다는듯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며 말하고 있다.
"피해자들 주변 인물들 중에도 수상한 점은 전혀 없어?"
태연의 물음에 순범이 고개를 젓는다.
"최동만, 시신 유기장소, 납치장소에 다시 가봤어?"
"네. 가봤는데요, 역시 쓸만한건 없었습니다. "
"마지막 시신 발견된 후로 들어온 실종신고 중에 눈에 띄는건?"
"없습니다 아직."
"이거, 분명히 연쇄살인인건 맞는거 같은데 말야, 피해자들한테 이렇게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는것도 그렇고..
근데 시신유기 장소는 왜 이렇게 제 각각인거야? 태연아 니 생각은 어떠냐? 연쇄살인이 맞는거 같지?"
"맞아요. 연쇄살인"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 남자의 시선이 회의실 문으로 향한다.
이어, 정인을 제일먼저 발견한 동만이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키며 귀신이라도 본듯한 표정으로 덜덜 떨기까지 한다.
"ㅇ유..유유검사님"
"아니.. 이..게 무슨? 정말 유검 맞아? 어?!"
동만과 순범은 금방 기절이라도 할듯 낯빛이 파리하다.
"어서오세요 이교수님, 유정인"
태연만은 그의 이름처럼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정인과 재하를 맞아준다. 그모습에 순범이 태연의 팔을 잡아 끌며 정인과 태연을 번갈아 본다.
"어떻게 된거냐? 어?"
"어제 말했지? 이번 사건에 합류하게될 프로파일러. 이쪽은 이재하교수님, 그리고 이쪽은.....유정인이 맞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지금..."
두사람이 받았을 충격이 꽤나 커보인다. 놀랄만도 했다.. 그들은 정인의 장례식에 다녀왔고, 땅속에 묻히던 그 붉은관의 주인이 정인일꺼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자리 비켜줄까?"
태연이 순범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며, 정인을 향해 묻는다.
"부탁드릴께요."
정인의 말에 태연과 재하는 회의실을 나가고..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동만을 보고 정인이 피식 웃는다.
"최동만! 나 귀신 아니니까 그만 좀 떨고 앉아봐.."
정인이 동만쪽으로 조금 휠체어를 움직이자 동만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앉는다.
"황형사님 잘.. 지내셨어요?"
순범은 말도 못하고 벌어진 입만 벙긋거리고 있다.
"놀라셨죠?.. 동만이 너도 놀랐을꺼야.. 미안해. 미안해요 황형사님.."
"정말 유검 맞는거에요? 아니.. 나는 정말 이해가 안되는게 내가 아니 우리가 분명 유검 장례식이라고 다녀왔는데..
아니 그럼 대체 그 관에는 뭐가 들었던거요?"
"아무것도요.."
정인이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두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보시는것처럼.. 제 다리가 전같지 않아요. 그땐..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무섭기도 했구요...
어리석게도 그랬어요. 이런 모습 두사람한테.. 그리고 민검사님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제 모습을 보면서 민검사님이 가질 죄책감을..
그때 전.. 그런 모든걸 감당할수 없을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러면 안됐다는거 지금은 알지만..
그땐 도망치지 않고는 살수 없을것 같았어요. 황형사님한테도 동만이한테도 정말 미안해요"
어느새 동만은 꺼이꺼이 소리까지 내며 울고 있고, 정인의 얘기를 듣던 순범은 잔뜩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그러고보니 그때 이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긴 했어.. 이제 그게 다 설명이 되네..어찌됐든 이렇게 살아있으니 됐네. .
우리야 그거면 된거고, 태연이랑은 ?.."
"고맙게도...이해해 줬어요.. 미안하고.. 감사해요 모두.."
화내지않고.. 큰소리 한번 없이 이렇게 저를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두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에 정인의 눈시울이 또 한번 붉어진다.
"유검사니임~~~ 으허엉"
정인이 울고 있는 동만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정규직 됐다면서? 축하한다 똥만. 아! 황형사님 좋은사람 생기셨다던데 맞아요? 축하드려요"
어느새 저를 보고 예전처럼 웃어주는 두사람을 보며 정인 자신도 예전으로 돌아간듯 마음이 홀가분하다.
"똥만! 밖에 계신 두 남자분 좀 모시고 와라. 회의 해야지."
"넵! 유검사님"
"나 이제 검사 아니다. 똥만아"
"어? 그럼.. 뭐라고 .."
"누나라고 부르던가"
"예? .. 누..누나요? 그래도 돼요?"
정인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회의실을 나가는 동만이다.
"황형사님도요. 민검사님 부르시듯 이름 부르셔도 되고, 민검사님처럼 유정인 하셔도 돼요."
"난 그래도 유검이라고 부르는게 좋아요. 한번 검사는 영원한 검사! 이 황순범이는 그렇거든"
"감사해요.. 늘.. "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소릴 해요. 잠깐 떨어져 있었어도 한식구끼리 그런소리 말아요 어?"
순범이 정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한다.
곧 회의실 문이 열리고 태연과 재하, 동만이 들어온다.
"얘기 다 끝난거야?"
태연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인. 태연이 의자 하나를 빼서 치우고 정인의 자리를 만들어준다.
태연이 자리에 앉자 정인이 작게 속삭인다.
"민검사님 말이 맞았어요. 동만이도.. 황형사님도 "
태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특검팀 세 남자 사이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정인.
재하 역시 웃으며 그런 정인을 바라보고있다. 그녀가 행복해보여 안심이 되면서도.. 그럼에도 그 행복이 제 곁이 아닌 태연의 곁에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에 씁쓸한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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