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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L'amant/destiny

조각글 - 무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열기를 가득 품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 마신다.
타 들어갈 듯 뜨거운 그것이 내 안에 머물고 있는 감정도, 그에 대한 기억까지도 모조리
태워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달아오른 해변을 걷고 또 걸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뜨거운 모래에 파묻히는 발은 감각을 잃어갔다.
숨 쉬는 것이 힘들고, 시야가 흐려질때까지.
인적이라고는 없는 여기.. 그냥 이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죽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러는 쪽이 지금보다 평화로울 거라고..
매일, 매 시간, 매 분, 초 마다 마음에서 미친듯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보다는...

점점 더 몽롱해지는 정신을 깨우기라도 하듯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일 몇 차례씩 지나가는 비가 오늘은 이런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제법 거세게 내린다.
피부를 때리는 물방울에도 여전히 정신은 혼미하다.
몸 안에 남아 있는 기운이 손끝으로 발끝으로 모조리 흘러 나가는 기분이다.
거센 빗줄기 너머 흐릿한 인영이 그보다 더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결국 내 뜻대로 하도록 두지
않는다. 나를 이대로 살아있게 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그 역시 알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흐릿한 인영의 주인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 뜨여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한다.
미련한 짓인줄 알면서도... 나는 한 가닥 희망을 놓지 못한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는 내 안의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또 얼마나 헛되고 바보 같은 것인지 언제나 그렇듯 다시 깨닫고 만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시니컬한 웃음 소리가 내 것인 아닌듯 낯설다.



내가 눈을 떴을 때 하늘은 비가 아닌 뜨거운 햇살을 뿌리고 있었다.
발코니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등지고 서있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딱히 죽으려는 건 아니었어"

"그래?"

"그래"

어지러움을 느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코 끝에 와 닿는 달콤한 향기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마셔. 정말 죽을 생각이 아니었다면"

갑작스레 밀려드는 허기에 나는 절망했다.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향기의 끝에 놓인 와인 잔. 
그 안에서 일렁이는 붉은 빛깔의 액체.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잔을 들었고, 단숨에 그것을 비워버렸다.

타는듯한 갈증이 잦아들고, 눈동자는 선명한 보라빛으로 물든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손이 내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춘다.

"그 눈...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할까? 아마 양쪽 모두겠지."

나는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뭐 딱히.. 내 것으로 녀석의 흔적을 완전히 덮지 못했다는게 몹시 짜증스럽다는 정도?"

"애초에 모든 시작은 너였어!"

그는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넌 날 죽이려고 했어!"

"그랬지"

치미는 화를 못이겨 손끝이 떨려왔다.

"그래놓고 날 다시 살려낸 것도 너야.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뭐 그다지"

그는 화를 내는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원하는게 뭐야.. 나한테 원하는게 뭔지 말해"

화를 내도 달라지는건 없다는게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움츠러든 내 목소리에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쉰다.

"말하면? 들어줄건가?"

"말해봐"

"내가 원하는게 너라고 한다면? 아직 그 녀석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럼 그걸 줄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거였나? 나를 이용해 그를 기다리는것?

"날 니 곁에 살려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올거라고 생각해? 훗.... 너 답지 않게 순진한
생각을 하네. 올거였다면.. 벌써 한참 전에 왔겠지..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사람한테
난 .. 특별하지 않아... "

그러면 안되는데.. 또 다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에게 내가 특별했던적이 .. 단 한순간이라도 있긴 했을까?.. 난.. 모르겠어.."

"하아... 어쩔 수 없네. 별로 얘기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말야. 내가 널 죽이려고 했던
그날 말야. 그 잘난 민태연이 얼마나 필사적이던지 정말 눈물 없이 봐주기 힘들었거든."

억지로 눈물을 참느라 내내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이 걸렸다.

"간단한 문제였어. 어차피 내가 네 목에 이를 박아넣었을때 넌 죽게 되어 있었지.
그럼 그 자식은 그냥 네 피를 마시고 살면 되는거였어. 그런데 내가 생각 못한게 
있었던거지 그 민태연에게 너, 유정인이 어떤 존재인지. 저도 다 죽어가면서 네 혈관에
자기 피를 흐르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던 그 자식 모습은 정말 눈물겹더군.

그렇게 네 목숨줄을 붙들어 놓은게 그 녀석이야. 뭐 물론 그대로 사경을 헤메던 너를
이렇게 제대로 살려 놓은건 나지만.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 앞의 남자가 버릇처럼 말하던 흔적이라는게
그런 의미였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충격 같은건 받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꾹꾹 눌러 두었던
그리움이란 감정이 흘러 넘칠 뿐..

"내가 원하는게 민태연일거라고? 천만에, 내가 원하는건 네가 맞아.
널 살려낸 이유? 궁굼해졌거든. 대체 너의 무엇이 민태연을 그렇게 필사적이게 만들었는지."

마음이 허물어져 버렸다. 둑이 무너지듯.. 한 순간 내 안의 모든것이 깨지고, 부서지는것
같았다. 허물어진 틈새로 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쉴 새 없이 흘러 나온다.
나는 실신하기 직전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는 그런 나를 어째선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발코니 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어 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나는 오늘도 뜨거운 햇살아래 아직도 낯설기만한 이국의 해변을 걷고 있다.
더 이상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 같은건 하지 않는다. 
한참을 걷다가 돌아와 목을 축인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붉은 빛깔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지만, 더는 이런 내 모습을 역겹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한 그가 이런 모습으로라도 내가 살아있어 주길 바랬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 있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늘에 설치해둔 해먹에 몸을 뉘이고 나른함에 눈을 감았다. 
해와 파도소리.. 바다내음이 섞인 바람..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주변을 둘러싼 평온함 안에 그가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가슴 아팠다.
목 뒤로 넘어가는 눈물이 쓰다.

"살아 있으면.. 그러면 언젠가.. 한번은.. 한번쯤은 만나러 와 줄래요?... "

나는 오늘도 혼자서 말을 건넨다. 언젠가 그리운 목소리가 답해주길 바라며...




++



해변을 둘러싼 절벽위 나무 그늘뒤로 몸을 숨긴 남자는 벌써 몇시간째 정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그렇게나 애틋하면서 이제 그만 만나는게 어때?"

부러 거친 소음을 만들며 다가서는 제 기척에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 태연을 향해
이 비아냥 거린다.

"요즘은 좀 나아진건가?"

"적어도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은 안하는거 같긴 해. 말해줬거든, 네 녀석이 저를
어떻게 살려냈는지. "

태연이 엘을 죽일듯 노려보지만 그는 그저 싱글거리며 양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해 보일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살려 놓으라며? 달리 방법이 없는걸 낸들 어쩌겠어? 자길 그렇게 만든게 나라고 
생각하게 하는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거 너도 봐서 알잖아?"

태연이 한숨을 내쉬며 골치가 아픈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덕분에 요즘은 별 거부감 없이 피도 잘 마시고 있고, 전처럼 쓰러질 때까지
걷거나 하는 것도 하지 않으니까 된거잖아. 그보다 언제쯤 만날거야?
보모 노릇 하는것도 지겹거든?"

태연이 한숨을 내쉰다.

"이제 얼마 안남았어. 모든게 정리 되고나면.. "

흐려지는 말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것 같았다. 얼마 안남았다고는 해도 이제 정말 힘든
고비가 남아있구나 .. 라고 엘은 생각했다.

"그러다 나한테 뺏기면 어쩔거야? 그 마음 나한테 달라고 계속 조르는 중인데"

태연이 피식 웃으며 돌아선다.

"잘 해보던가. 그만 가야겠군. 다음엔 이쪽으로 연락할테니까 그렇게 알고. 그럼 부탁한다."

못내 아쉬운듯 정인이 있는 곳을 다시 한번 돌아본 태연은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건네며
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돌아선다.

"잘난척은! 정말 뺏을지도 모른다니까!"

뒤통수에 대고 소리치는 엘의 심통 섞인 말 속에 진심이라는게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태연은 생각했다.






"제길! 잘난 놈 같으니라고!"

태연이 남긴 말에 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게 유정인의 선택이라면.. 그래서 그 여자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돌아서 가는 태연의 뒷모습과 저 멀리 정인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거라고.. 그래서 아마도 정인의 마음이 제 것이
되는 날 같은건 영원히 오지 않을것 같다고 엘은 생각했다. 

"빨리 해결하고 와라 민태연. 저 여자 그만 울리고..."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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