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당신이 뭐라든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것처럼
정인의 젖은 눈동자가 태연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당신 앞에 설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당신에겐 이 두근거림이 느껴지지 않나요?...
천둥같은 이 소리가 어째서 당신에겐 닿지 못하는걸까요... 제발...한번만..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원하는 내 마음에 귀기울여 줘요.. 제발...'
가슴속에 쌓아뒀던 감정이 소용돌이쳐 정인을 흔들어 놓는다.
차곡차곡 눌러 담아두었던 그 마음이 비명처럼 터져나와 아픈 고백이 되어버렸는데...
태연은 아직도 너무나 침착해 보인다.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무슨 얘기요? 제가 얼마나 더 민검사님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데요? 얼마나 더 .. 비참해져야 하는데요..?"
이미 상처 받을대로 받은 마음과.. 진즉에 대부분 버려지고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마저 무참하게 구겨져버렸다.
어쩌면.. 그깟 구겨진 자존심 마저 내팽개치고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왜 아무말도 안하세요..? 차라리.. 전 아니라고.. 민검사님 마음에 내가 들어갈 자리 같은거.. 없다고 말하세요.
차라리 내가 싫다고 하세요. 비겁해요! 침묵하는걸로 도망치지 마세요. 그렇게 절...기대하게 만들지 마시라구요. 제발..."
바짝 들렸던 고개는 숙여지고.. 마음을 꿰뚫을듯 태연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은 떨궈지고 말았다.
어깨가 들썩일만큼 복받치는 설움에 정인은 그만 두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정인의 작은 어깨가 떨려오는걸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태연은 구겨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한켠이 지릿하게 눌려오는 통증에 두눈을 꾹 감았다 뜬 태연이 한발짝 정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꾹 쥐어졌던 주먹은 어느새 느슨해졌다. 두손안에 다정함을 담아 떨리는 정인의 양 어깨를 그러쥐었다.
제 몸의 반이나 될까 싶게 가냘픈 그녀를 품안에 가두고 조심스레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안에서 느껴지는 작은 바둥거림에 태연은 쓰게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안에 모두 흡수시켜 버리고 싶을만큼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그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젖은 머리에 입을 맞췄다.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해서일까?.. 품안에선 희미한 떨림이 전해져온다..
"내가..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할 수 있을까?.. 더이상 담을 수 없을만큼 이미 한가득 내안에 니가 있는데...
너한테서 도망쳐보려고 애써봐야 자고 일어나면 다시 제자리인걸 아는데... 너한테 이 모든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니가 날 제대로 알고 나서도 그렇게 좋아해줄까.. 너에 대해서 만큼은 생각처럼 되질 않아... 그래.. 다... 말해줄께..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하는거라면.. 널 이렇게 아프게 하는것 보단... 내가 좀 더 아픈게 나을테지....."
또다시 침묵으로 제게서 도망치는거라 생각했는데...
등뒤로 느껴지는 그의 손길이 다정하다.. 어느때보다 가까이 느껴지는 그의 체취에 심장이 터질것 같은데...
그는 그 마음 한가득 이미 제가 있다고 말한다.
놀라움과 설레임으로 동그랗게 떠진 눈가를 따라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이 흘러내린다.
정인은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 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약속해요. 변하는건 없을거에요.."
정말 그럴까?.. 넌 정말 모든걸 알고도 날 떠나지 않을까?...
'정인아.. 난 겁이나... 이제와서... 너 없이 내가... 살 수 있을까?...'
태연은 젖어서 안된다는 정인을 억지로 소파에 앉혀놓고 커다란 타월을 그녀의 머리위로 덮어주었다.
정인이 소파 끄트머리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친채 가죽소파가 젖을까 노심초사 하는동안.. 어쩐일인지
태연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방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던 그가 거실로 나온건 정인이 추위와 피곤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을때였다.
"유정인.. 정인아.."
졸고 있는 정인을 꽤 기분좋은 얼굴로 내려다보던 태연이 조심스럽게 정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깨를 잡는 서늘한 감촉에 움찔거리긴 했지만.. 저를 부르는 부드러운 음성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게 떠지지 않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린 정인은 놀란 나머지 소리라도 지를 뻔 했다.
숨결이 느껴질듯 가까이 그의 얼굴이 있었으니까...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는 정인의 모습에 태연이 피식 웃어버렸다.
"감기들어. 안에 따뜻한 물 받아놨으니까 우선 좀 씻는게 좋겠다."
"네? 네..네?"
"뭘 그렇게 놀라..비를 그렇게 잔뜩 맞았는데.. 그 상태로 있을 순 없잖아."
그제야 정인은 흠뻑 젖어 제 몸에 엉겨붙은 젖은 옷들을 내려다봤다.
눈앞으로 그의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정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당연한듯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았다.
침실안 욕실앞에서 정인의 손을 놓아준 태연은 어색한듯 뒷목을 쓸었다.
"내가 쓰는것들 뿐이라 그렇지만.. 그래도 젖은채로 있는것 보단 나을테니까... 갈아입을 옷 준비해줄게..
천천히 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처들어온건 정인인데 왠지 여자가 쓸만한 목욕용품들이 없는걸 그가 미안해한다.
"감사해요...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한 정인은 후다닥 욕실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태연은 잠깐동안 넋이 나간듯 욕실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욕조엔 딱 알맞은 온도의 물이 받아져있고, 그 옆으론 샴푸며 비누, 바디샴푸, 목욕타월 같은 것들이 놓여있다.
그것들은 모두 새것이었고, 세면대위에도 샴푸나 비누 같은것들이 줄서 있는걸 보면... 아마도 이 모든것은
정인이 쓰기에 괜찮을 것들로 그가 한참을 고르고 골랐으리란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배려와 따스함이 느껴져 가슴 저 안쪽부터 따뜻해진다.
정인을 욕실로 들여보내고 거실로 나온 태연은 지갑을 챙겨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려던 태연은 정인이 있는 침실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다.
그녀가 이 집안에 있다는것 ..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제 가슴이 따뜻해지는걸 보면... 이제는 정말...
정인이 없이는 제 목숨 하나 연명하는 일이 아무 의미도 없어질거란 생각이 든다...
낮은 한숨과 함께 태연이 집을 나섰다.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한 스포츠웨어 매장으로 들어간 태연은 후드안쪽이 오렌지색인 여성용 흰색 후드티와
역시 같은색의 트레이닝 팬츠를 골랐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선 태연은 그 짧은 시간동안 혹시라도 무슨일은 없는건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자신을 발견하고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어쩔 수 없다.. 정인에 대한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쉽게 생각이 되질 않는다.
' 대체 유정인이 내게 무슨 짓을 한걸까... '
실없는 생각으로 잠시나마 걱정을 떨쳐버리며 집으로 돌아온 태연은 침실로 들어가 침대위에 종이백 그대로
사온 옷들을 올려두고 욕실문을 노크한다.
역시나 안에선 화들짝 놀란 정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태연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는다.
"침대위에 옷 가져다 놨어. 난 거실에 있을게.."
따뜻한 물속에 몸을 뉘이고 고개만 물밖으로 내놓은 정인은 젖어버린 제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그렇게 샤워기 틀어놓은듯 쏟아지던 빗속에서 뛰고 걸었어도 속옷까지 젖지 않은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건가?..
몸을 녹이고 샤워를 마친 정인은 큰 타월을 몸에 두르고 욕조까지 깨끗이 닦아 놓고서야 욕실을 나왔다.
침대위에 놓인 종이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정인이 포장지도 뜯지 않은 옷가지들을 보며 웃었다.
역시.. 그답다..
어쩌면 그가 입던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쯤을 기대했던 정인은 그새 바쁘게 움직였을 그를 떠올리며
배시시 미소 짓는다.
옷을 갈아입은 정인이 방문 밖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자 이쪽을 향해 앉아있던 태연이 벌떡 일어선다.
정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온다.
흰색에 오렌지색이 예쁘게 섞인 후드티가 좀 큰듯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어린 동생이 언니나 오빠 옷을
빌려입은 느낌이 들어 귀엽기만 하다.
" 옷... 사오셨어요?.. "
고개를 끄덕이는 태연을 보며 정인이 미안한듯 웃으며 고맙다 말한다.
"이리 와봐"
정인은 그가 내미는 손을 다시한번 주저없이 잡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태연은 정인의 앞에 작은 온풍기를 끌어다 틀어주고는 주방에 놓인 커피머신 앞으로 간다.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하는 뒷모습에 정인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곧 태연은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을 정인에게 건넸다.
커피잔을 받아든 정인의 손등을 반이상 덮은 소매가 눈에 들어온다.
태연은 정인에게서 커피잔을 다시 뺏어 탁자에 올려두고 양쪽 소매를 손목까지 접어주고 나서야 다시 커피잔을 쥐어준다.
어느덧 정인의 양볼이 발갛게 달아올라있다.
"맛있어요..."
정인이 입가에 우유거품을 묻히고는 아이처럼 웃는다.
태연은 저도 모르게 정인의 턱을 잡고 엄지로 입가에 묻은 우유거품을 닦아냈다.
놀란듯 동그랗게 떠진 눈이 마치 어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양이 같다.
어쩐지 조금 더 놀리고 싶어져 태연은 우유거품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게 떠진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정인을 두고 태연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식는다 어서 마셔."
그리고 태연은 욕실안에 정인이 벗어둔 젖은 옷가지들을 챙겨들고 세탁실로 들어가버렸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게 있던 정인은 휘휘 머리를 젓는다.
'후.. 유정인.. 정신차리자 정신! 민검사님이 놀리는거야.. 그러니까 이러면 안돼!'
정인은 태연만큼이나 길쭉하게 잘 빠진 아이보리색 가죽소파에 앉아 그렇게 몇번이나 스스로를 타이르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대고 있다.
피식 웃으며 정인의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은 태연은 문득 지금부터 제가 그녀에게 주게될 충격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문다.
온풍기가 내뿜는 따스한 바람앞에 정인은 소파위에 쪼그리고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다.
' 제대로 알게되도 좋아해줄까?.. 라고 했어... 다 말해준다구?.. 뭘?.. 대체 그게 뭘까?... 왜 그렇게....
아픈표정 이었을까?.. 내가 모르는 비밀...이... 뭘까?...'
이제야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오르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 아냐.. 그 비밀이 뭐든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건 민검사님이고.. 이렇게 오래 기다려왔는걸...
다... 다 괜찮을거야...'
모두 다 괜찮을거라고.. 그의 비밀이 제 마음을 변하게 하지 않을거라고 다짐하지만.. 왜일까?...
정인은 자꾸만 불안해진다.....
'Bloody L'amant > Blood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 (0) | 2013.12.31 |
---|---|
태연정인 - 이유(理由) 10 (完) (0) | 2013.12.31 |
태연정인 - 이유(理由) 8 (0) | 2013.12.31 |
태연정인 - 이유(理由) 7 (0) | 2013.12.31 |
태연정인 - 이유(理由) 6 (0) | 2013.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