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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3

 

***

 

 

 

정인이 무언가 할말이 있다는걸 느끼고 있었지만.. 어쩐일인지 정인은 종일 한숨만 쉬어댈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 한숨과 비례해서 커져가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태연은 아무것도 먼저 물어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머리가 아픈지 찡그린채 창밖만 보다 잠들어버리더니... 집에 온 뒤에도 움찔거리며 자꾸만

눈을 피한다...그래도.. 어쩔 수 없다... 먼저 말해주길 기다릴 수 밖에 .....

 

 

 

없으면 살 수 없는.. 지긋지긋하도록 스스로를 저주하게 만드는것.. 그 붉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잔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씻어내는 정인의 모습이 고맙고 또 고맙지만, 고마움보다 몇배 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태연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제나 .. 저제나.. 언제쯤 이야기를 꺼낼까 숨죽이며 기다리던 태연은 조심조심 곁으로 다가와 앉는 정인을 바라봤다.

 

어렵사리 느릿느릿 말문을 연 정인은 할말이 있다면서도 태연과는 눈도 마주치질 못한다.

드문드문 단어를 나열하듯... 점점 더 작게 기어들어가던 목소리는 탁자위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태연의 휴대폰 소리에 

묻혀 완전히 사그라들어 자취를 감춰버렸다.

 

왜 하필 지금인걸까..  한편으론 아쉽고, 다른 한편으론 다행스러워하는 스스로를 기막혀 하며...

태연은 속으로 거친 욕설을 뱉어냈다.

 

 

 

휴대폰 액정에 선명한 '박혜리'라는 이름에 태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 어, 그래 혜리야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혜리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떨리고 있었다.

 

# 오빠. 놀라지 말고 들어.

 

- 뭐?  너 무슨일 있는거야?

 

# 아니 난 아무일 없구.. 아, 잠깐만. 오빠 전화 끊지마.

 

혜리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멀어지고, 곁에 있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건지 작게 말소리가 들린다.

태연은 휴대폰을 귀에 댄채 가만히 정인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어쩔줄 몰라하며 동그란 두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아직도 사춘기 소녀같다.

실없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더니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인채 

빼앗길 수 없는 보물이라도 되는듯 쿠션을 가져다 꼬옥 끌어안는다.

 

멋대로 뻗어지는 손을 따라 한걸음 정인을 향해 다가선다. 자꾸만 쓰다듬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말캉한 과일젤리같은

작은 입술에 입맞추고 싶어진다. 정인은 태연을 자꾸만 취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깊어질수록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한번도 가져본적 없던 마음.. 그녀로부터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두려움...

마음을 감추는일도 더이상은 할 수 없을만큼.. 정인은 태연의 가슴속을 빈틈없이 꽉 채워버렸다.

 

 홀린듯 걸음을 떼려던 태연은 전화속 혜리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야했다.

 

 

# 오빠. 오빠? 

 

- 얘기해

 

# 곰아저씨 찾았어. 

 

- 뭐?! 

 

# 그동안 계속 수소문 하고 있었는데.. 오늘 비슷한 사람이 있다고 연락을 받았거든..

 

 

태연과 연지, 혜리의 보육원시절 친아버지처럼 돌봐주셨던 분...덩치가 크셨고, 푸근한 인상을 가졌던 그분을 아이들은 

곰아저씨라 불렀었다. 

연지를 데려올 수 있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신경써 주셨던 분인데... 행방을 알수 없게 되고 줄곧 알아보고는 

있었지만, 연지를 그렇게 잃고나선 아저씨를 찾는다 해도 뵐 면목이 서질 않았다. 

 

보육원의 잡다한 일들을 모두 맡아 보시던 아저씨는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어린 딸과 함께 살고 계셨다.

아저씨가 갑자기 사라지신건 태연과 연지, 혜리 모두가 보육원을 떠난 후, 아저씨도 보육원 일을 그만두신 후였다.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때 원장선생님은 아저씨에 대해 알고 계신듯 했지만 아무말씀도 해주지 않으셨다..

 

그 후 얼마 않있어 재정악화로 보육원은 문을 닫았고,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몇년전 원장선생님을 찾아뵈었을때 아저씨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아저씨는 애지중지하던 딸아이를 지키려다 사람을 

죽게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 했을땐 이미 아저씨는 복역을 마치고 언딘가로 종적을 감춘 

뒤였다.

 

스토킹 사건으로 혜리와 다시 만났을때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후로 태연이 연지와 나쁜피.. 그리고 

정인과의 일들로  정신이 없던 그동안 혜리는 줄곧 아저씨를 찾으려고 애썼던 모양이다.

 

 

 

 

- 지금 아저씨랑 같이 있는거니?

 

# 응.. 근데 오빠.. 아저씨가 많이 아프신거 같아..

 

- 뭐?! 어디가? 아니, 그보다 지금 어디야?

 

# 여기 우리집 근처 대학병원이야. 어딘지 알지? 오빠. 아저씨가 자꾸 가신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간신히 붙잡고 있는 중이야.

 

- 그래, 알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꼼짝말고 있어. 금방 갈테니까

 

 

 

너무 갑작스런 소식이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아저씨께서 많이 아프시다니 마음이 급해졌다. 방으로 들어가 대충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정인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정인은 분명 기다려줄테고, 이해해줄거라 믿으며 태연은 정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 정인아. 급하게 가봐야할 일이 생겼어. 얘기는 다녀와서 다시 하자. 괜찮지?"

 

정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보다 더 불안해보이는 정인에게 미안함을 담아 미소를 지어보였다.

문단속을 당부하고 돌아서던 태연은 팔을 붙드는 손길에 멈칫 돌아보았다.

 

팔을 잡은 정인의 가녀린 손이 떨리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한걸까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눈물을 매단 눈동자가 안타깝다.

 

"정인아..."

 

"아니에요. 다녀오세요. 운전.. 조심하구.."

 

머뭇거리는 태연을 향해 어서 가라며 재촉하는 정인의 모습이 애처로워 쉬이 발이 떼어지질 않는다.

같이 가겠냐고 묻는 태연에게 정인은 어린애 아니라며 등을 떠민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놓으며 현관 앞에 나와 열심히 손을 흔드는 정인을 몇번이나 돌아보았다. 

정인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던 불안함이 태연에게로 옮겨온듯.. 운전대를 잡은 태연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병원에 도착했을때 아저씨는 잠들어 계셨다.

 

"어떻게 된거니? 아저씬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거고?"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숨도 돌리지 못한채 묻는 태연을 혜리가 잡아 끈다.

 

"아저씨 지금 막 잠드셨어. 우선 나가자 오빠" 

 

병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피곤해 보이는 혜리를 앉혀두고, 태연이 자판기를 찾아 음료수를 사와 혜리의 손에 쥐어준다.

음료수를 받으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는 혜리는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고 태연을 올려다 본다.

 

"앉아 오빠. 나 고개 아프다"

 

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혜리의 옆에 앉았다.

 

"아저씨.. 얼마 못사신데.."

 

병실에 잠든 아저씨의 얼굴을 본 후라 이미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명이.. 뭐래?"

 

"뇌종양... 지금 아저씨 눈도 거의 안보인데.."

 

"대체 그동안 어디 계셨던 거라니?"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셨나봐.. 아저씨 교도소 들어간 후에 딸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나보더라구.. 그 딸 하나 

바라보고 사셨는데..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알 수가 없고.. 처음엔 딸 찾으러 다니셨던 모양인데 ..."

 

태연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좀 더 일찍 찾을 수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바쁘다는 핑게로 어쩌면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죄책감이 태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길어야 몇개월 이라는데.. 치료는 이미 늦었고.. 진통제로 고통이라도 줄여주는것 뿐이래..  "

 

"그..래... "

 

굳어진 표정의 태연을 바라보던 혜리가 가만히 그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태연은 의사를 만나 좀 더 자세한 애기를 들은 후, 아저씨께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아저씨 오빠 왔어요"

 

침대에 기대앉아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저씨는 혜리의 목소리에 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고개는 돌렸지만, 시력이 나빠진 탓에 희미한 실루엣만 보이는 아저씨가 태연을 손짓해 부른다.

 

"태연이냐?.. 이리.. 가까이.."

 

태연이 한걸음에 다가가 내밀어진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예 아저씨. 저 태연입니다...  "

 

"검사가 됐다면서? 장하구나.. 그래.. 네가 어릴적부터 총명했지.. 나는 너희들 다 잘될줄 알았다."

 

"다 아저씨 덕분입니다... "

 

"내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가 보구나.. 딸하나 있는것도 제대로 못지키고.. 자식 같은 너희들한테 해준것도 없이..

이렇게 짐만 되니.. 면목이 없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 그런말씀 마세요. 아저씨 안계셨으면 지금의 저희들 없었을겁니다."

 

아저씨의 목소리에도.. 태연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가득하다..

혜리가 돌아서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태연은 피곤해 보이는 혜리를 보호자 휴게실로 보내놓고, 아저씨의 곁을 지켰다.

 

아저씨는 드시지도 못한채 간신히 몇모금 넘긴 물마저 모두 토해버리기 일쑤였고, 그런 아저씨의 수발을 드느라

태연은 정인에게 전화하는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새벽녘.. 화장실에 가시겠다는 아저씨를 부축하던 태연의 셔츠에 아저씨는 좀 전에 간신히 드신 환자용 유동식을 

모조리 게워내셨다.  연신 미안해서 어쩌냐고 말씀하시는 아저씨에게서 그 옛날 커다랗고 듬직하던 곰아저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