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념 下 (부제:거짓말)
Written by Angelique(carna)
정인의 감겨진 눈에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태연의 심정이 착잡하기만 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정인의 얼굴엔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태연은 가만히 정인의 뺨위에 손을 얹는다.
안타깝게 떨리는 손끝으로 정인의 눈물을 닦아내며....
차마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한숨마저 소리없이 삼켜버렸다.
그렇게 또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태연은 한동안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을 일으켜 의자에 기대도록 한뒤, 재킷을 벗어 덮어준 태연은 천천히 정인의 등과 무릎아래로
손을 넣어 안아올렸다.
한손에 정인의 가방을 챙기고 나오는길 혹시라도 깰까 싶어 걸음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조수석에서 잠든 정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연은 조심스레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기대어 한숨과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탁하게 흐려진 검은 하늘... 머릿속 가득한 부질없는 질문들에 답을 찾듯 희미한 달빛을 더듬어 찾지만..
구름뒤에 숨어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달빛은 그마저도 태연의 마음을 외면하는듯 하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해본적 없는 진심은 마음속 깊이에서 꺼내달라고 요동친다.
꺼내놓지 못한 정인에 대한 마음이 아픔이 되어 가슴을 옥죄어도.. 털어놓을 수는 없다..
저에 대한 마음만으로도 저토록 괴로워하는 정인에게 제 마음 조금 편해지자고 더 큰 짐을 지울 수는...
... 그래.. 그럴 수는 .. 없다 .....
그녀와 다른 존재라는것도 모자라 언제고 본능에 굴복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런놈이니 이제 결정은 네 몫이라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좋게 포장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인에겐 같은 얘기다.
평생을 정인에게 미움받을지 모르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감당하는건 제 몫이니 괜찮다. 그쯤은.. 참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진실도.. 진심도.. 숨겨야만 한다.
그것이.. 정인을 위해 태연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쉬지도 않고 급히 마신 술 탓에 정인은 잠결에도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그덕에 몸을 덮고 있던 태연의 재킷이 스륵 미끄러져 떨어져 버렸다.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어깨를 움츠리던 정인이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놀이터...
놀이터 옆길로 들어가면 정인이 사는 빌라가 나온다.
뇌가 흔들리는것 같은 어지러움에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켠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익숙한 차안.. 정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에 못이겨 정신을 놓아버리기 직전 들렸던 태연의 목소리는 꿈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자고 그에겐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게 되는걸까..
비어있는 운전석.. 자책하는 마음보다는 그가 곁에 없는 것이 더 아쉽다.
그런 제 모습이 한심하고, 그런 제 마음이 견딜 수 없이 가엽다.
주먹을 꼭 쥔채 눈을 들어 차창밖을 살피자 곧 저만치 벤치에 앉은 태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토록 아프고 가여운 마음을 가진것은 저 하나일텐데 오늘 그의 어깨가 저보다 더 슬퍼 보인다.
떨어진 태연의 재킷을 접어 가슴앞에 꼭 안은채 정인이 조용히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는 소리에도 태연은 무릎위에 팔을 고이고 머리를 감싼채 고개를 들지 않는다.
무슨생각을 하는지 정인의 조심스런 발걸음이 앞에 멈추도록 태연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정인이 가슴앞에 소중히 안고 있던 재킷을 펼쳐 태연의 어깨를 덮어준다.
그제야 고개를 든 태연의 눈빛이 초초하게 흔들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
달리 대답을 바라고 묻는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제 어깨에 걸쳐진 재킷을 다시 정인에게 덮어준 태연은 정인의 어깨를 눌러 벤치에 앉힌다.
"잠깐 있어"
그대로 돌아서 차로 가는 태연의 뒷모습이 어쩐지 다시는 못볼 사람처럼 느껴져 울컥 목이 메인다.
"민검사님!"
괴로운듯 굳어진 표정으로 태연은 가만히 정인을 돌아본다.
어째선지 차마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어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암것두 아니에요.."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것처럼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정인에게서 한참.. 눈을 떼지 못하던 태연이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돌아선다.
잠시 후 돌아온 태연이 생수병을 열어 정인에게 내민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따위가 뒤섞여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정인의 모습에 태연은 가만히 정인의 손을
끌어다 물병을 쥐어주고 그 곁에 앉았다.
"강현욱선생이 전화를 했어.. 집이 어딘지 묻더군.. "
"아... 죄송해요.. 괜히 저땜에.."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취하도록 마신적.. 없었잖아"
정인은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태연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었어요.. 당신 앞에서는.. 내 마음 받아달라고 떼쓰고 매달릴거 같아서.... '
시선을 느낀 태연이 고개를 돌려 정인을 마주 본다.
어느새 촉촉하게 젖은 정인의 눈동자에 홀린듯.. 태연의 손이 정인의 뺨을 감쌌다.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망울에서 또르르 눈물이 떨어져 태연의 손을 적신다.
눈물에 데이기라도 한듯 태연은 황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숨막히게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의 거리를 더해놓는다.
"강현욱 선생이 많이 걱정 하던데.. "
태연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깨뜨린다.
"...."
무슨말을 해야할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 아니, 그보다 태연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어
정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괜찮은 사람 같던데.. 널 대하는것도 가벼운것 같진 않고.."
심장이 차갑게 얼어버리는것 같다. 주먹을 꼭 말아쥔채 정인은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괜찮은 사람이면...좋은사람이면.. 마음이 끌리지 않아도.. 가슴이 뛰지 않아도..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은걸까요.."
"그런뜻이 아니라.."
"뭐.. 사랑도 한때니까.. 어차피 바래지고 흐려지는거라면.. 그냥 좋은사람.. 괜찮은사람.. 그런 사람이랑 친구처럼
그렇게 기대고 사는것도 괜찮겠죠... "
"유정인.. 난.."
저도 모르게 화가 나 비꼬듯 말해버린 정인은 제 앞에서 죄지은 사람마냥 머뭇거리는 태연의 모습에 그제야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요.. 나쁜뜻 아닌거.... 민검사님이 무슨애길 하는건지.. 알아요."
"유정인.. 정인아.. 난..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건.."
정인의 입술새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제 행복이 누구한테 있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민검사님은... 그걸 다른데서 찾으라고 하시네요.."
고개를 숙인채 땅바닥만 뚫어질듯 노려보던 정인은 두눈을 꾹 감아버렸다.
가득 차올라있던 눈물이 흙바닥 위로 툭.. 떨어진다.
손끝으로 남아있는 눈물을 훔쳐내고, 정인은 제 마음처럼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정인은 밝은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곁에 앉은 태연을 돌아본다.
정말.. 죽을 죄라도 지은듯 고개를 숙인 태연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울컥 눈물이 차오를것 같아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민검사님.."
정인의 부름에 태연이 고개를 돌려 정인을 바라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얘기해.."
"제 마음이 가벼워질때까지.. 거기 있는 제 마음이 흐려질때까지요.. 넌 아니라고.. 너무 차갑게.. 너무 매몰차게 밀어내지 말구..
그냥..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제 눈에 민검사님이 조금 덜 반짝이게 되면.. 그때.. 날 사랑해주는 다른 마음도 돌아볼테니까.."
정인은 애써 방긋 웃으며 태연을 돌아보았다.
금새 눈물이라도 흘릴것 같이 슬퍼보이는 태연의 눈동자가 정인을 따라 미소 지어준다.
"그래.."
그러겠노라는 태연의 대답이 너무도 아파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것 같았지만..
정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끝까지 웃어보였다.
'당신이 원하는거니까.. 당신이 바라는거니까.. 당신이 눈부시게 반짝여도 아니라고 할게요.. 내 행복이 당신한테만
있더라도 아니라고 할게요.. 당신을 단념하는건 아마 할 수 없을테지만... 그렇다고 할게요.. '
마음을 숨긴 세사람이 올려다 본 그날의 밤하늘은 두려울만큼 검고 어두웠다.
그들이 서로에게 준 마음들이 어둠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버린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네 마음을 혹은 내 마음을 모르는척..
사랑하지 않는다고.. 혹은 사랑이 아니라고..
내 마음을.. 혹은 너를 단념하겠노라고..
거짓이 보태어져 마음에 생채기를 만든다..
누구도.. 행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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