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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외과 과장 김선영'
문에 쓰여진 이름이 반갑다. 문을 두드리자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재하가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정인이 휠체어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간다.
"안녕하셨어요? 김선생님. 오랜만이죠?"
"정인씨! 어서와요, 이게 얼마만이야 대체~ "
선영이 벌떡 일어서 정인에게 달려온다. 4년전 정인의 담당의 김선영.
입원해 있는동안.. 그리고 퇴원 후 몇달...네번의 자살시도.. 그때마다 달려와 치료해주며.. 언니처럼, 엄마처럼 저를 야단치고 다독이던
선영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인과 태연의 관계.. 정인이 태연으로부터 숨고싶어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
때마다 무너져내리던 정인의 마음을 일으켜준 고마운 사람.
힘들었을텐데.. 태연이 그녀를 찾아가 정인의 상태에 대해.. 이후엔 정인의 죽음에 대해 취조하듯 윽박지르고 닥달했을때도..
정인의 마음을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않아주었던..
이사람이 있어서 끔찍한 기억뿐인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곳.. 에 좋은 기억따위 있을리 없다..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들리는것 같다..
병실 밖에서 들리던 태연의 목소리..
어째서 만날 수 없느냐고..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소리치던... 늘 냉정했던.. 어떤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태연.... 그런 그가 무너지듯 소리치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것 같다.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 품에 안겨 울고싶었지만...
혹시라도 그를 원망하게 될까봐... 저로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는게 두려워서..
그앞에 나설수 없는 제 모습이 가여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어야했다..
그날의 기억들이 4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정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서글픈 기억이 뒤엉켜 마음을 옭아매고 있다..
"몸은 어때요? 불편한데는 없고?"
선영의 물음에 기억의 늪에서 빠져나온 정인이 생긋 웃어보인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다리 못움직이는거 빼면요"
"여전하네 정인씨. 밀린 얘기는 우선 검사 끝나고 하도록 하고, 갈까요? 오늘 몇가지 검사하고, 결과나오면 연락할테니까, 그때 다시 오던지 아니면 내가 가도 되고. 괜찮죠?"
"검사 받아봐야... 걷게 될것도 아닌데.. 꼭 해야해요?"
정인의 물음에 선영은 일부러 과장되게 실망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정인씨 미국에 있다오더니 나약해졌네? 그냥 건강검진이라고 생각해요. 꼭 해야하는거니까
꾀 부리지 말고, 알잖아요. 아직 여기 있는거"
선영이 정인의 머리를 가리킨다. 어두워지는 정인의 표정...
금방이라도 잡아먹을듯 덮쳐오는 우울함을 부수고, 재하의 음성이 들린다.
"괜히 어리광 부리는겁니다. "
"누가 어리광을 부린다는거야?!"
재하를 흘겨보며 꽥 소리치는 정인에게 재하는 부드럽게 웃어보인다.
"어머,재하씨 간호사들한텐 그렇게 웃어주지 말아요. 우리 간호사들이 미남한테 많이 약하거든~"
선영의 말에 재하가 쑥스러운듯 웃고, 정인은 입술을 삐죽인다.
"피이~ 누가 미남이에요? 오빠가요? 미남이 다 죽었네요."
정말 그랬다. 누가 봐도 미남이라 할만한 얼굴.. 184센티나 되는 훤칠한 키. 적당히 마른 단단한 체격. 그런 재하가 정인에게 하듯 웃어준다면 웬만한 여자들은 두말없이 넘어갈텐데 말이다.
하지만 저 미소가 오로지 정인을 위한것임을 그녀는 모르는걸까?
어째서 재하의 저 마음이 정인에겐 닿지 못하는걸까..
선영에게는 만나지 못하고 엇갈리는 두사람의 마음이 보이기라도 하는듯... 씁슬한 미소가 떠오른다..
**
정인이 이런 저런 검사를 받는동안 재하는 초조하게 문앞을 서성인다.
잠시후 문을 열고 나오는 정인의 모습이 지쳐보인다..
"힘들어?"
정인은 말할 기운도 없는건지 힘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선영과 그동안의 일들을 얘기하는동안 정인의 표정이 어느때보다 편안해보여 다행이다..
병원 로비에 거의 다 왔을때쯤 정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재하를 돌아본다.
"왜?"
"오빠.. 나 가방 .."
"이번엔 또 어디다 두고 온거야?"
"김선생님 진료실에..헤헷..."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말고, 알았어? 제발 찾으러 다니게 만들지마!"
미안한 마음에 괜히 실없이 웃어보이는 정인에게서 단단히 다짐을 받은후 재하가 걸어온 길을
빠른걸음으로 되돌아간다.
재하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로비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정인이
조심스럽게 휠체어를 움직인다.
4년이나 휠체어 신세를 졌지만.. 항상 재하가 밀어주거나 안아서 옮겨준 탓에 정인은 아직도
휠체어를 움직이는게 그리 익숙하지 않다.
힘겹게 팔을 놀려 바퀴를 움직이고 로비에 가까이 다다랐을때 저만치 검은바지에 검은자켓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후줄근한 츄리닝을 입은
덩치 큰 남자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오래전 병원에서 자신을 밀어내고 대신 칼에 찔렸던 태연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이란 정말.. 징그럽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 잊히지 않는것들이 있다는게 ..
소란스러움의 정체를 확인한 정인이 이제 그만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고개를 들고..
그와 동시에 저만치 말끔한 차림의 남자도 일어선다.
저보다 훨씬 큰 덩치의 남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일어선 태연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있다.
**
어서 뒤돌아 여길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 그득할뿐, 정작 휠체어 바퀴를 잡은 손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이 된 정인이 다시한번
손에 힘을 줘보지만.. 하필 이 순간에 망할 휠체어는 말을 듣질 않는다. 이럴줄 알았으면 평소에 휠체어 움직이는걸 좀더 연습해 둘걸 그랬나보다.
아.. 이런 순간에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있다니.. 유정인 참 못났다.
마음은 급한데 제대로 움직여지는건 아무것도 없고...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가..이럴땐 정말 죽을만큼 싫다..
태연이 저를 볼까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어쩌면.. 그가 어서 봐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제 모습이 부끄러워 끝내 눈물이 차오른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손등으로 훔쳐내고.. 고개를 숙인채 아...이제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겠다..
아무리 애써도 움직이지 않던 휠체어가 너무도 가볍게 휙 돌려진다.
**
재하가 선영의 진료실에서 정인의 가방을 찾아들고 뛰다시피 돌아왔을때. 예상대로 정인은 아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말을 들을리가 없지' 작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재하.
저만치 사람들 사이로 휠체어에 앉은 정인의 뒷모습을 발견한 재하가 그녀를 찾았다는 기쁨에
저도모르게 웃음띤 얼굴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뭔가.. 정인의 뒷모습에서도 그녀가 허둥대고 있다는걸 느낄수 있다. 대체 뭘 본걸까?
정인의 시선을 따라간 재하의 눈에... 그의 모습이 들어온다.
민태연... 왜 하필 이자리에 그가 있는걸까?.. 정말 운명의 장난이라면 미치도록 화가난다..
다시 정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제 모습을 얼마나 원망하고 아파하고 있을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정인에게 달려가는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걸까..
정인의 뒷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눈물이라도 날것 같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아 들다시피 방향을 바꾸고 놀란 정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제야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이상하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럴리가 없다..아니.. 이래서는 안된다...'
재하의 마음이 내려앉는다..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이 좋아서.. 그 웃음을 볼수 있으면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것 같아서
한참 어린 막내동생 같아서.. 그렇게 .. 햇살같이 환하게 웃게 해주고 싶었다.
저도 모르던 제 마음이 누구에게 흘러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 재하가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흔든다.
민태연.. 저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올까봐 겁이난다.. 겁이나서 심장이 미칠듯이 뛰어댄다..
정인아..네 눈에 그남자를 담지마라.. 제발.. 그자식때문에 울지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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