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비(雨)처럼 내게로 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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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옷 젖는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는 빗줄기에 우산을 꺼낼것까진 없겠지 싶어 그대로 걷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옷깃을 적시고 만다.
피할 수 있었는데..
이미 홀딱 젖어버린채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현관에 선채 가방안에서 고이 접혀진 바짝 마른 우산을 꺼내놓으며 후회한다..
그도 내게 그러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젖어버린 마음을 부여잡고 왜 피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탓하고 원망하며.. 후회하고 있다..
사랑은 피할 수 없는거라고?.. 교통사고 같은거라고?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탓하는 짓은 하지 말라고..?
그래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랑을 피할 수 있었다. 아니, 피했어야만 한다.
나는 이 마음의 끝이 어떨지.. 그를 사랑한 결과가 어떠할지 .. 이미 시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사라졌을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태연은 다시 돌아왔지만,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폭발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 누구도 그가 사라졌던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순범에게 조차 그 일과 관련해선 질문조차 허락하지 않는듯 보였고, 그래서 정인은 더더욱 그일에 대해
한마디도 물어볼 수 없었다.
폭발과.. 폭발이 있기 전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정인은 남들이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연을 유인하는 미끼가 되기를 원한건 아니었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L에게 제대로 반항도 못한채 맥없이 끌려가 버렸고,
결과적으론 자신이 태연을 놈의 앞에 고스란히 인도한 꼴이 되어버렸다는게 정인의 생각이었다.
오늘도.. 정인은 가슴이 온통 짓무를정도로 사랑하는 그를.. 똑바로 보는것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쉼없이 눈길이 머무는
곳엔 그가 있고.. 그렇게 돌아보지 않는 그의 뒷모습에 아파해야 했다.
"동만. 혹시 민검사님한테서 연락온거 없어?"
"네? 아뇨.. 민검사님 부장검사실 가셨잖아요."
"알아.. 아는데.. 가신지 얼마나 됐지?"
"음.. 3~40분쯤.. 된거 같은데요. 왜그러세요?"
태연이 부장검사 호출을 받고 나간 후 내내 안절부절 못하는 정인의 모습에 동만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빤히 쳐다보며 묻는데도
정인은 불안하게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만 잘근거리고 있다.
"유검사님...?"
한참을 정인을 지켜보다 아무래도 안되겠는지 걱정스레 부르는 동만의 목소리를 듣기는 한건지 정인은 핏기없는 얼굴로 입구쪽만
바라보고 있다.
"유검사님. 유검사님!"
눈앞을 휘휘 저어대는 동만의 손에 그제야 시선을 돌린 정인이 되려 무슨일 있냐는듯 저를 올려다보자 동만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폭폭 내쉰다.
"왜? 뭐? 나 불렀어?"
"아까부터 안절부절... 어디 안좋으세요?"
동만의 걱정섞인 물음에 정인은 그제야 지금 제 모습이 또 이상해 보이겠구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전과 다르게 태연이 부장검사의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때마다 혹시나 이제라도 그의 행방이 묘연했던걸
문제삼는건 아닌지.. 그래서 혹여 태연이 모든것들에 대한 책임을 혼자서만 지려고 하고 있는건 아닌지, 온갖 걱정과 염려가
정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워버린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물어보는건 도저히 용기가 생기질 않으니 정인은 그저 그가 부장검사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속절없이 애만 태울 뿐이었고, 그때마다 동만이나 순범이 덩달아 얼마나 불안해하는지는 그녀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냐.. 그냥.. 가신지 한참 된거 같은데 안오시니까.. 혹시 어디 다른데 들러 온단 얘기 없었나 궁굼해서..."
제가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인것 같아 결국 정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린다.
"유검사님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세요. 민검사님 오시면 제가 문자 보낼게요."
동만의 말에 책상위에 놓인 손거울을 들여다보니 하얗게 질린 얼굴이 제 눈에도 안쓰럽다. 그에게 이런 얼굴을 보이는것도
못할 짓이다 싶어 한손에 휴대폰을 꼭 쥔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걱정마세요. 별일 아닐거에요."
동만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 나온다.
동만이나 순범도 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 .. 괜시리 저 혼자 유난을 떠는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정인은 결국 옥상으로 향하던 걸음을 화장실로 돌려버렸다.
**
부장검사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태연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부장실에 머문 시간이 대략 40분은 족히 된것 같다. 이미 해결된 지난 두개의 사건에 대해 이미 보고서를 올린 상태였음에도
부장검사는 사소한것까지 일일이 설명을 요구했다.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묻는 부장검사의 모습이 마치 그것을 즐기는것처럼
보여 부아가 치밀었지만, 결국 그 역시 윗선의 누군가로부터 지시받은 일을 하는것 뿐이리란 생각에 태연은 그저 쓴웃음만
삼켜야했다.
태연이 다시 돌아오고 어느 누구도 그가 사라졌던 한달간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태연이 그것에 대해 의아함 조차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건 그가 감금되어 있던 그 한달동안 모든 일의 배후에 그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을만큼의 큰 권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팀을 유지시키면서 태연이 그대로 특검팀을 이끌어가도록 하는 대신 그는 오늘처럼 한달에 세번 직접 사건에 대한 보고를
지긋지긋할 만큼 세세하게 해야만 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욕심같은건 없었지만, 특검팀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욕심은 분명히 있었고, 태연은 상대가 누군지,
그 대단한 권력이 어디쯤에 있는건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무엇 한가지라도 확실해질때까지는 그대로 순응하는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순범에게도 하지 않았다. 정인에게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부장검사의 호출이 잦아질수록 그때마다 사색이 된채 저를 기다린 그녀의 얼굴을 대할때마다 가슴이 쓰리도록 안타깝지만..
그래서 한걸음에 달려가 그 작은 몸을 품에 안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지만..태연은 애써 정인과의 사이에 선을 긋는 중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겪지 않아도 좋을 일을 겪게 만들었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더는.. 가까이 가서는 안되는거다.
오늘도 그렇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만 바라보고 있을 정인의 얼굴을 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저 아래 어딘가로
쿵 떨어져 내리는것 같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연은 풀어두었던 정장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호흡을 고른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다보니 돌덩이라도 올려놓은듯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심호흡을 하듯 낮은 한숨을 내뱉은 후 막 걸음을 떼려던 태연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 재빨리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정인의 목소리만 들어도 움찔거리며 숨어버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한심해 하는것도 잠시..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울먹이는듯한
목소리에 마음이 쓰여 저도 모르게 소곤대는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
화장실로 들어간 정인은 아무래도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막을 방도가 없어 가장 안쪽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그렇게 화장실에 틀어박힌 정인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 못해 가여운 생각이 들때까지 소리죽여 눈물을 쏟아냈다.
한참만에 밖으로 나와 세면대 앞에 선 정인은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와 울어서 살짝 부어오른 눈가를 식히기 위해 몇번이나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어야 했지만 덕분에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처량맞게 화장실 구석에 숨어 소리도 못내고 울면서 얻은 결론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 감정 하나 어쩌지 못하고선 그의 곁에 있어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건 뻔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몇년을 그사람
하나만 바라보고 키워온 마음을 하루아침에 싹뚝 잘라내는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이 마음이
옅어지기를 바라는 수 밖에.. 그러자면 언제까지고 그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될테니 정인은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미안했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대학때부터 가깝게 지내는 선배언니에게 어느날 술에 취해 이 짝사랑에 대해 털어놓았었다. 선배는 전혀 가망없어 보이는 그런
짝사랑은 빨리 끝내야 한다며 줄곧 누군가를 소개시켜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자고로 사랑의 상처는 다른 사랑으로 치유받는거라며 몇번이나 자신을 설득하려던 선배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정인은 충동적으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바빠요?"
[아니 괜찮아.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모양이야? 너 혹시 울었니?]
울었냐고 묻는 선배의 말에 정인은 또다시 울음이 터져버릴것 같아 휴대폰을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아니.. 울긴.. 그냥.. 좀 피곤하고 힘들어서.."
소리가 웅웅 울리는 화장실을 나와 복도 끝의 창가에 기대선 정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수화기 너머 선배도 따라 한숨을 내쉬며 끌끌
혀를 찬다. 그리고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는것처럼 아직도 그 빌어먹을 짝사랑에 가슴앓이 하는중이냐고 물어온다.
"하아.. 빌어먹을 짝사랑이지.. 그래서 말인데.. 저기.. 선배.. 지난번에 나 소개시켜준다던 사람 있었잖아.. 그거 아직 유효해요?.."
[응? 야! 그럼 당연하지! 그 지긋지긋하게 힘든 짝사랑 집어치울 생각이 드디어 생긴거니? 잘 생각했다. 언제 만날래? 너 좋은 날로
말만해. 안그래도 그녀석 니 사진 한번 보더니 언제 만나게 해줄거냐고 성화였는데 잘됐다. 언제로 할까?]
곁에 있었다면 기특하다고 엉덩이라도 두드려줄 기세로 잔뜩 들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선배의 목소리에 정인은 어느새 아픈 마음을
위로받는것 같았다.
"근데.. 선배.. 그쪽에 내 얘기 어디까지 했어요?.. "
[너 나 몰라? 집안 따지고 배경 따지는 그런 못난 놈을 내가 너보고 만나보라고 하겠니?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니까 그런다.]
"아는데.. 그래도 내가 불편해서 그래.. 선배가 미리 얘기해줘요. 내 아빠가 누군지 알고도 만나볼 생각 있다고 하면.. 그럼 만나볼께.."
[알았다 알았어. 우리 깐깐한 유검사님을 내가 무슨수로 이기겠냐. 그런 얘길 전화로 구구절절 늘어놓을수는 없는거고, 내가 오늘
그 친구 만나서 얘기해보고 이따 밤에 전화할께. 그럼 되겠지?]
"응..고마워요 선배.. "
[됐네요~ 그 인사는 그 짠내나는 짝사랑 완전히 날려버리게 되면 그때 받는걸로 하자. 그니까 우리 이쁜 후배님~ 기운 좀 내자. 응?]
"응.. 그럴게.. 들어가요 선배"
선배와의 통화에 갑갑했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것 같아 정인은 끊어진 전화기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벽에 머리를 기댄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머릿속을 꽉 채우는건 또다시 태연의 얼굴이다.
' 민검사님..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요.. 매일 당신 얼굴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사람한테 마음 주는게.. 가능할까요..
해야겠죠..? 무너지기 전에.. 내가 허물어져서 당신앞에 울면서 매달리는 일이 생기기 전에... 이 마음.. 접어야하는거죠..? 그게..
내가 민태연이란 남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겠죠..'
좀전부터 가늘게 내리기 시작했던 가랑비는 어느덧 창밖의 풍경을 촉촉히 적셔놓고 있었다...
**
의도치 않게 정인의 통화를 엿들어버린 태연은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것 같은 기분에 휘청이는 몸을 벽에 의지한채
멍하니 서있어야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태연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비상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내리는 비를 피해 옥상 입구 한쪽에 기대어 선 태연은 다시한번 정인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도 마지막에 그를 기다리는건 야속하게도 한가지 결론 뿐이었다.
그토록 오랜시간 제게 머물러 있던 그녀의 마음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것.. 잔인할 정도로 매몰차게 외면해왔어도 늘
한결같기만 하던 그 마음이.. 그 미소가.. 이제야말로 정말 저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불안함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릴것 같았다.
대체 언제 이토록 깊이 들어와 버린걸까.. 정인의 마음이 제것이 아니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태연의 삶은 휘청이고 있었다.
지켜줘야 하는거라고.. 상처주게 되더라도 그녀만큼은 평범한 삶을 살도록 해줘야 하는거라고.. 그 눈빛을.. 그 마음을 외면하기만
했던건 어쩌면 이렇게 약해질 스스로가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민태연.. 넌 그냥 멍청한 겁쟁이였구나..'
건조하기만한 삶을 살던 그의 마음에 유정인이란 여자는 안개처럼 낮게 깔려있었다. 그저 그렇게 안개인줄만 알았는데...
그녀는 어느새 단비를 내려 메마르고 갈라져 상처투성이였던 그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건 제가 속한 세상과는 다른곳의 얘기라고만 여겨왔던 태연이었지만.. 이미 마음 깊이 정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는 이미 그에게 행복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이제와서 바로잡을 수 있을지 조차 알수 없다. 울타리도 없는 휑한 들판에 혼자가 되어 서있는 기분이었고
뒤죽박죽 엉망이된 머릿속은 유정인이란 이름 석자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정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던 태연을 그렇게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