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조각 - 바보
- 그녀의 삶에 내가 다시 들어가도 되는걸까...
바보
Written by Angelique(carna)
"태연아, 문 앞에 옷 가져다 놨다."
욕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이어 들리는 라울의 목소리에 태연은 욕조에 틀어놓았던 물을 잠갔다.
따뜻한 물이 욕조를 채우고 욕실 가득 뿌옇게 수증기가 차오른다.
먼지와 땀에 절어..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흙바닥을 뒹굴며 몸싸움을 한 덕에 지저분하다 못해 누더기가 되어버린 옷들을
벗어버리고 뜨겁게 김이 오르는 욕조에 몸을 뉘였다.
"으윽..."
라울의 집에 도착해 어느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워낙 많은 양의 피를 흘렸기 때문인지 태연의 재생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 따뜻한 물이 닿자 군데군데 아직 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는 달리,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다만.. 자신이 이제껏 겪은 일들과 그 배후가 누구인지..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것들.. 그것들 보다 먼저 태연의 머리와 마음을
채우는것은 '유정인' 이라는 여자의 얼굴과 안위였다. 아마도 이제껏 자신을 견딜 수 있도록 해준건 정인이었던 모양이다.
"유정인..."
혹시라도 그날의 일로 정인이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던 마음은 몇개의 혈액팩을 비워내도 모자랄 만큼 심각한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정인의 안부를 묻도록 만들었다.
정인씨는 괜찮아... 라는 라울의 대답에도 태연은 몇번이나 거듭해서 묻고 또 물었다. 정말 정인인 괜찮은거냐고..
많이 마르고, 전체적으로 면역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정인은 꿋꿋하게 위험한 고비를 모두 넘겼노라고..
지금은 씩씩하게 너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러니 우선 네 몸을 챙겨 정인에게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라울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태연은 지금 갈등하고 있다.
과연.. 정인의 인생에 자신이 다시 끼어드는것이 잘하는 일일까?.. 정인 뿐 아니라 순범이나 동만 모두의 인생에 자신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을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해가 되는것은 아닐까...
다시한번 정인의 이름을 입밖으로 내어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것 같았다.
시린 마음을 달래듯 따뜻한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리도록 물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 남아있던 상처들도 모두 아물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라울이 가져다 둔 트레이닝 바지와 면티를 입고, 소파 등받이에 걸쳐진 포근해 보이는 스웨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집어들었다.
겨울에도 그다지 난방에 신경쓰지 않는 집안에서 얇은 티셔츠 한장만 입고 있으면, 늘 보는 자기가 춥다고 잔소리를 해대던 순범을
떠올리며 스웨터에 팔을 꿰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가득찬 와인잔을 들고 소파에 몸을 묻은 태연은 낮은 한숨을 뱉는다.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면... 자신을 가뒀던 그들이 가만히 내버려둘까?.. 아니 아마도 제게는 가족같은 사람들을 미끼로
또다시 저를 꾀어내고야 말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무능한것일까.. 연지의 행방조차 찾아내지 못한채.. 이제는 또다시 다른 누군가를 연지처럼 만들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
하고 있는 꼴이라니..
반쯤 남은 잔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제 안에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째야 좋을지 도저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도어락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라울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손에 들린 쇼핑백을 태연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형"
"정인씨한테 연락 안할거냐?"
"글쎄..."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정인씨.. 너 정말 많이 기다리는데.."
"그런일을 겪고도..."
"널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만큼 큰거겠지.. "
태연의 다음말을 막아버린 라울은 제가 그의 집에서 가져온 옷을 꺼내 갈아입는 태연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려고?"
"알아볼게 있어"
"몸은.. 괜찮은거야? 아직 좀 더 쉬는게 좋지 않겠어?"
"괜찮아.. 그럼 다녀올게"
더는 태연을 말리지 못하고.. 라울은 태연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본다...
여지껏 지고온 죄책감의 무게는 오늘따라 더 무겁기만 했다.
*
다른 볼일을 보는 대신 태연은 검찰청으로 발길을 돌렸다. 물론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고.. 길건너에 서성이는 태연은 검찰청을 빠져나오는 차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고 있다.
혹시라도.. 정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그의 발을 이곳에 묶어두고 있었다.
얼마나 서있었을까.. 봄이 가깝다지만 아직은 차갑기만한 3월의 바람이 매섭게 태연을 질책하고 있지만..
정인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일이 생긴건 아닌지.. 기다림은 걱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움과 기다림이 뒤섞여 마음의 아픔은 실제의 아픔이 되어 태연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아픔이 깊어지려 할때... 그립고 그리웠던.. 일분, 일초도 잊지 못했던 정인의 모습이 태연의 눈에 들어왔다.
차는 어디 둔건지.. 무거운 발걸음으로 검찰청 입구를 빠져나오는 정인의 모습은 태연의 기억에 있던 모습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아무생각 않고 그 앞에 나타나고 싶어졌지만.. 주먹을 꽉 말아쥐며 참아낸다.
혹시라도 그녀가 저를 볼까.. 태연은 쓰고있던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8차선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정인을 따라 걸었다.
대체 앞을 보고는 걷는건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채 힘겨운 걸음을 내딛는 정인의 모습에 태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어디까지 저렇게 걸을 생각인걸까.. 버스 정류장을 지나친걸 알고는 있는걸까?..
그저 묵묵히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를 걷던 정인이 마주 오던 자전거와 부딪힐뻔 했을때는 태연은 도로를 가로질러 그녀에게 달려갈뻔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던 이에게 몇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하던 정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태연이
서있는 도로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태연은 저도 모르게 정인의 시선을 피해 마침 눈에 보이는 건물로 들어간다. 제발 .. 이대로 정인이 갈길을 가주길 바라지만...
다음순간 들리는 자동차의 급정거 소리에 본능적으로 건물밖으로 나와버린 태연의 눈엔 도로를 가로질러 이쪽으로 오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차가 오는 쪽은 보지도 않은채 오직 태연이 있는곳만 바라보며 달리는 정인의 곁으로 차들이 아슬아슬
멈춰선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태연은 정인이 지나온 쪽과는 다르게 뻥 뚫린 도로를 빠르게 달려오는 차들에 손을 들어 세우며 도로 한가운데 서있는 정인을 향해
움직였다.
"움직이지 말고 거기 있어!"
태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걸까.. 어쩌면 정인의 눈엔 오직 태연밖에 보이지 않는것 같았다.
"말 들어! 유정인!"
다시한번 거칠게 뱉어지는 태연의 단호한 목소리에 걸음을 떼려던 정인은 움찔 자리에 멈춰섰다.
갑자기 뛰어든 태연 때문에 멈춰선 차량들의 운전자들이 큰 소리로 욕설을 뱉어내고, 뒤 따라 오던 차들이 미친듯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다.
도로 한가운데 선 정인의 앞에 다다른 태연이 정인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는다. 그리고 정인의 작은 몸을 감싸듯 품안으로 당겨 안았다.
"뭐하는거야. 죽고 싶어?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
"민검사님이 아닐까봐.. 내가 잘못 본걸까봐.. 민검사님이 달아나 버릴거 같아서.."
울음섞인 정인의 목소리에 태연은 머릿속이 멍해지며 이제까지보다 더 큰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넌 여전히 바보같구나.. 나 같은 놈이랑 엮여서 좋을게 없다는걸 아직도 모르겠어?.."
"가지말아요. 나한테서 달아나지 말아요 제발!"
꾸짖는듯한 태연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정인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이제껏 담아두었던 가슴속 말들을 꺼내고 있었다.
"니가 겪었던 그런일.. 다시 없을거라고 말 못해. 나 때문에 넌 또 다치고 상처 받게 될지 모른단 얘기야.."
"상관 없어요. 상관 없다구요!"
태연의 말을 막으며 애원하듯 소리치는 정인의 말에 굳어졌던 태연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비친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그리웠던 정인의 얼굴을
감싸자 가슴속을 채우는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넌.. 정말 바보구나..."
"민검사님 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요 난.. 그러니까.. 제발... 곁에 있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나한테 있는걸까.. 널 바보로 만들어도.. 괜찮은걸까.."
"곁에 있을 수 있다면.. 평생 바보로 살아야 한대도 난 상관 없어요.."
울먹이는 목소리와 달리 정인의 눈동자는 확신에 차 반짝인다. 그 맑은 눈빛은 언제나 그랬듯 태연에게 희망을 준다.
조금은.. 아니 어쩌면 많이 힘들지 모르지만.. 정인과 함께라면 그 역시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확인받듯.. 정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널 너무 많이 힘들게 해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정인아..."
"괜찮아요.. 돌아왔으니까..괜찮아요 이제.."
태연이 사라져버린 후,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웃음... 정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