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 이유(理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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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의 한 레스토랑.
"그날 이사람이 여기 왔던게 확실한건가요? 분명히 보셨다는 거죠?"
지배인에게 사진속 누군가의 알리바이를 확인한 정인이 막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려고 할때였다.
"저.. 혹시.. 유정인? 어머 맞네! 정인이 맞지?"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듯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정인에게 다가와 호들갑스럽게 아는체를 하지만..
정인은 도통 그녀를 어디에서 본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구..시죠.?"
"어머 ! 나 기억안나? 나야 희주. 진희주."
"희..주?.. 아 ! 진희주? 너 왜이렇게 달라졌어? 몰라보겠다. "
대학동창 진희주.
"어머~ 기지배 ! 뭐 다 그런거지. 너야 뭐 예전부터 손댈곳 없이 예뻤으니까 모르겠지만, 난 튜닝 좀 했어~"
'기지배 튜닝이 아니라.. 아예 갈아 엎었네.'
호호거리며 웃는 희주를 향해 정인이 어색한 미소를 보낸다.
"유정인은 대학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대학생이라 그래도 믿겠어.. 근데 누구 만나러 온거야?"
"어? 아니, 일 때문에.. "
"아, 맞다 ! 너 검사 됐다는 얘기 들었는데. 어머! 그럼 여기서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거야? "
희주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속삭이듯 물어오는게 재밌다.
정인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주제를 돌린다.
"아니. 그런건 아니구. 그냥 뭐 좀 알아볼게 있어서..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다. 넌 잘 지냈어?"
"나? 나야 잘 지냈지. 진짜 너무 반갑다. 기지배 연락 좀 하면서 살지. 동창모임도 한번도 안나오구. 뭐하느라 그렇게 두문불출이니?"
그녀는 여전히 호들갑스럽다. 대학때 지인의 지인을 통해 알게된 그녀는 무용과 학생이었다.
학과도 그랬고, 겉모습부터 부잣집 딸이라는 티를 팍팍 풍기던 희주는 정인과는 뼛속부터 달랐지만.. 이상하리만치 정인을 좋아했다.
누구든 보통 처음엔 관심을 가지다가도 어찌어찌 정인의 아버지가 누구라는걸 알고나면 슬금슬금 피해다니기 일수였는데.. 희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한편으론 고맙기도했고, 또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희주는 정인의 양손을 맞잡고 그 앞에서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너무 반갑다. 정인아~. 이럴게 아니라, 잠깐 앉으면 안돼? 우리 진짜 오랜만이잖니~"
"미안.. 나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따로 한번 보자. 미안해"
정말 미안했고, 아마 그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을것이다. 희주는 아쉬운듯 어깨를 늘어뜨린다.
"아참 ! 연락처 ! 번호 뭐야? 아니아니, 잠깐만 내 전화기가"
희주의 가방은 대체 저기 뭐가 들어가긴 할까 싶게 자그마한 핸드백이다.
그런데도 희주는 마치 커다란 자루안에서 꺼내듯 그 작은 핸드백 속을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낸다.
그 모습이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싶어 웃음이 난다.
희주는 정인이 번호를 찍어주자마자 통화버튼을 누른다.
"자~ 이렇게하면 내 번호도 찍혔을테니까. 꼭 저장해놔~ 알았지? 꼭이다?!"
정인이 웃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희주 넌 약속있어서 온거야?"
"어? 아~ 저기 "
그녀가 가리킨 자리에 누군가 앉아있다.
"야. 너 일행을 두고 이렇게 나랑 수다 떨고 있었던거야? 진짜.. 넌 하나도 안변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아빠 친구분 아들. 나랑은 아주 어릴때부터 남매처럼 지내서, 나 이런거 아~주 잘알아 ㅋㅋ"
킥킥대며 웃는 희주를 따라 정인도 웃는다.
"그럼 난 그만 가야겠다. 나중에 통화하자. 얼른 가봐. 아무리 친한 사이래도 너무 기다리게 한다."
그녀가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놀랐지만 정인은 이내 희주의 등을 토닥여준다.
기어이 레스토랑 입구까지 따라나온 희주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 정인이 피식 웃는다.
"진희주. 정말 하나도 안변했네. ㅋ"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번호를 저장하고 차에 시동을 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희주를 만났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릴 즈음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응.... 미안. 좀 바빴어.. 이번 주말? 그래 괜찮아. 어디? 아니 잘 몰라.. 알았어 찾아볼게.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응~"
몇년을 봐오면서도 정인이 개인적인 통화를 하는걸 본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동만과 순범이 눈동자를 빛내며 통화중인 정인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다.
정인이 전화를 끊자마자 순범이 동만에게 눈짓을 보낸다.
이럴땐 또 어떻게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는건지. 동만이 잽싸게 정인을 향해 "누구에요?" 하고 묻는다.
"뭐가 누구야?"
"전화요~ 혹시 유검사님 애인이라도 생기신거에요?"
"뭔인? 야 ! 내가 애인 만들고, 만날 시간 있으면 잠을 더 자겠다. 안그래도 피곤해 죽겠구만.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하셔~"
"유검사님 진짜 어떻게 애인이랑 잠을.. 그러니까 유검사님이 애인이 없으신거잖아요"
"최동만! 좋게 말할때 일해라~ 어?!"
두 남자의 의심에 찬 눈초리가 짜증스러워 정인은 동만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 사무실을 나온다.
옥상으로 올라간 정인이 난간에 기대며 허공에 대고 중얼거린다.
"애인은 무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 날 거들떠도 안보는구만.. "
바빴던 덕에 잊고 지냈었는데..
덕분에 또 생각이 나서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곁에 있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했는데.. 언제고 그를 제대로 도울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갈수록 짙어지는 욕심에 견디기 힘들어지는건 자신이라는걸 알면서도.. 이렇게 그의 곁에 가까이 있는 날들이 쌓일수록...
하루가 다르게 욕심은 커진다...
그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어 머리도 기르고, 매일아침 시간에 쫓기면서도 화장대 앞에 앉는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저를 동료 그 이상으론 보지 않는다...
"유정인.. 정신 차리자.. 제발.. "
오늘도 한숨섞인 혼잣말로 제 마음을 다독인다.
자신의 인생에 민태연이 아닌 다른 남자가 들어오게 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채.. 그렇게 정인의 한숨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