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6

Carna 2013. 12. 31. 22:07

 

***

 

 

 

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 잔뜩 신혼부부 기분을 냈건만... 막상 태연의 집앞에 도착하고 나니 정인의 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뭐해? 안들어갈거야?"

 

차에서 짐을 꺼내며 태연이 멍하게 서있는 정인을 돌아본다.

 

"드,들어가야죠.. 아!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들께요"

 

태연이 막 꺼내고 있는 그녀의 여행용 캐리어를 가리키며 정인이 말한다.

 

"됐고, 문이나 좀 열어줘"

 

태연이 던지는 열쇠를 얼결에 받은 정인이 주춤거리며 대문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정인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짓던 태연은 정인이 돌아보자 언제 그랬냔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대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넣어 돌린 후 조심스레 문을 밀자 무거워 보이는 철문은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린다.

정인이 쭈뼛거리며 다시금 돌아본다. 태연의 고갯짓에 정인이 들어가면 안될 곳에 발을 들이듯 조심조심 한발을

대문 너머로 들였다.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안 무너져"

 

"네,네?"

 

"그렇게 살금살금 걷지 않아도 바닥 안꺼진다고"

 

"아.. "

 

태연은 어색함에 죄없는 머리카락만 배배 꼬아대는 정인을 지나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어느새 현관앞까지 다다라

짐을 든채로 도어락을 해제하고 있다. 어쩐지 그 뒷모습이 태연도 꽤나 어색해 하고 있다고 말하는것 같다.

저도 모르게 푸흐 웃어버린 정인이 쪼르르 태연의 뒤로 가서 선다.

 

문앞에서 비켜서며 들어가라는 태연의 말에 정인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럼. 당분간 신세 지겠습니다!"

 

씩씩하다 못해 우렁찬 목소리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정인을 보며 태연이 피식 웃어버렸다.

 

 

 

태연이 혼자 사는 집이다 생각하니 왠지 심장이 요동을 친다... 정인은 가만히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방 쓰면 돼. 욕실은 안에 있어. 필요한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우선 짐부터 풀고 나와.  저녁 먹어야지."

 

 

정인의 캐리어와 정인을 위해 산 목욕용품따위가 든 종이백을 방안으로 들여주고 돌아서 나가려는 태연의 손을 정인이 붙들었다.

두손으로 태연의 손을 꼬옥 잡은 정인이 제 손에 잡힌 그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고마워요. 민검사님.. 민검사님 아니였음.. 아마 저 아무것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을거에요. 정말.. 많이 고마워요..."

 

괜히 태연의 손을 조물락 거리며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정인을 내려다보는 태연의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

입가에 웃음을 매단채 태연이 정인의 머리칼을 헝클어 놓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에 짧게 입을 마추었다.

 

"고마워.. 나도.."

 

정인은 무엇이 고맙냐고 묻지 않았다. 정수리에 꾹 눌렀다 떼지는 그의 입술에 그가 가진 마음이 모두 담겨있는듯 느껴져서..

그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태연이 방을 나가고나자 정인은 닫힌 문에 기댄채 방안을 둘러보았다.

파스텔톤의 연한 핑크색으로 칠해진 벽.. 역시 파스텔톤의 옅은 민트색의 침대와 책상.. 화장대와 옷장.. 

흰색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묻지 않았어도.. 이 방은 그의 동생 연지를 위한 공간일 것이다.. 어째선지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정인은 서둘러 캐리어를 열었다.

연지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에 들릴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연지야.. 미안.. 잠깐만 쓸게..' 라고 중얼거린 후 옷장을 열었다.

텅 비어 있는 옷장을 보며 문득 엘의 말이 떠오른다. 그보다 더 악독하다던... 연지를 데리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정인은 머리를 흔들어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고 차곡차곡 옷장안에 옷들을 넣었다.

화장대 위에 무슨 정신으로 챙겼는지 모를 몇가지의 화장품들을 줄세워놓고, 책상위에 노트북과 필기도구 몇가지를 꺼내두었다.

이제 비어버린 여행용캐리어를 옷장안 빈공간에 넣어두고, 마트 로고가 그려진 종이백을 가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안제와 바디크렌져 따위가 진열된 코너에 선채 한참을 망설이다 저를 보지도 못하고 뭐가 좋으냐고 묻던 태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정인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대체 그는 정인이 세안제 따위를 다 챙기지 못했을거란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걸까? 

그가 어떤게 좋으냐고 묻기 전까진 그런건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종이백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 세안제와 비누 샴푸 등을 꺼내어두고

거울을 본 정인은 울고 싶어졌다.

펑펑 울고나서 티슈로 꾹꾹 눌러 닦은 눈가에 아침에 공들여 했던 화장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게 번져버려서

꼭 서툰 스모키화장을 한듯 보였고 파운데이션도 군데군데 조금씩 얼룩져 있었다.

 

"으.. 이런 꼴로 다닌거야 나?.. 미쳤어 미쳤어 유정인."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쉰 정인이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클렌징티슈를 뽑아들고 남아있는 화장을 지웠다.

침대위에 꺼내둔 트레이닝 팬츠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욕실로 들어간 정인은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돌아와 스킨과 로션을 바른 후 

화장대 거울을 보며 잠깐 고민을 하다 그냥 일어섰다.

 

"화장은 무슨.. "

 

 

빼꼼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봐도 태연이 보이지 않아 문 밖으로 살며시 한발을 내딛다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린다.

 

"안 무너진다니까"

 

"아후... 놀랬잖아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앙탈 부리듯 놀랐다고 말하던 정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손목을 잡아 끄는 태연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앉아"

 

태연이 빼주는 의자에 엉거주춤 앉은 정인은 식탁위에 놓인 초밥도시락과 태연을 번갈아 본다.

 

"뭐해? 어서 먹어"

 

"그,그렇게 보고 계시면 .."

 

어렵게 꺼낸 말에 장난스레 돌아오는 대답..

 

"처음도 아니잖아?"

 

하긴.. 처음은 아니다.  이미 한번.. 태연의 집무실에 앉아 그가 빤히 보고 있는 동안 점심을 먹었으니 말이다.

낮게 한숨을 내쉰 정인이 포기했다는듯 젓가락을 들다말고 태연을 쳐다본다.

 

"그런데 말이에요. 민검사님. 제 얼굴이 그런걸 보셨으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얼굴이 뭐가?"

 

"아니.. 막 눈화장도 번지고.. "

 

"뭐가 어때서. 내가 보기엔 괜찮던데.. "

 

싱긋 웃으면서 말하는게 아무래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 안한거다 생각하니 정인은 괜히 심통이 난다.

 

"진짜 그런식으로 나오신다 이거죠?"

 

"어떻게 해놔도 예뻐. 화장 안한 얼굴도 예쁘고, 화장이 다 번져있어도 내눈엔 예뻐. 그러니까 심통내지 말고 어서 밥먹어"

 

태연의 긴 팔이 식탁을 넘어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인은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고 눈을 흘기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태연의 긴 손가락이 세수하느라 젖어 얼굴에 붙은 정인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한가닥씩 떼어 귀뒤로 넘겨주는 동안

정인은 군말 없이 그 손길을 받으며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엔 커피를 마시며 태연이 주방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생각보다 주방에 선 태연의 모습이 무척 잘 어울려보여 정인이 배시시 웃는다.

 

정리를 끝낸 태연이 정인을 데리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책을 집어들고 한팔로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꼼지락거리며 그의 팔안에서 빠져나오려던 정인은 이내 포기한듯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인이 제 팔안에서 빠져나가기를 그만두자 태연이 리모콘을 들어 오디오를 켰고, 정인은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태연의 옆얼굴을 올려다봤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와 숨결에 여지껏 상처 받고 놀랐던 마음이 모두 치유받는것 같았다.

 

 

두사람 모두에게 내일이 두려울 만큼 오늘이.. 지금이 행복했다..

 

 

 

 

어느덧 가슴께로 떨어진 정인의 머리를 어찌할지 몰라 굳어진 태연은 곧 고르게 내쉬어지는 숨소리에 피식 웃어버렸다.

조심조심 정인을 소파위에 눕혀두고 정인에게 내어준 방으로 들어가 침대커버와 베겟잇을 씌우고 이불을 펼쳐 정리했다.

거실로 나가 소파위에서 새근거리며 잠든 정인을 깨지 않게 살며시 안아들고 침대에 데려다 눕힌다.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고 가만히 정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태연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방을 나와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텅 비어있는 거실에 어째선지 솜사탕처럼 포근포근한 공기가 가득찬것 같다..

 

언제나 차갑게 식어있던 집안에... 정말 오랜만에..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아니다. 집안이 아닌 태연의 가슴안에 실로 따뜻한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