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7
Carna
2013. 12. 31. 22:26
***
어둡게 내려앉은 하늘빛이 잠시나마 정인이 머물렀던 공간을 온통 검게 물들인다...
태연은 이를 악문채 두눈을 감아버렸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이 공간에 정인이 없다는것이.. 아니 그녀가 저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온것부터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태연아.."
뒤에서 들려오는 순범의 목소리에 무겁게 감겨진 눈꺼풀을 들어올린 태연의 입술 사이로
그보다 더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온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정인의 가방에서 쏟아져나온 그녀의 소지품들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을 꿰뚫는 괴로움에 꽉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려온다.
"우리가.. 내가 찾아야해 형."
"그래, 그래야지... 뭐 부터 하면 되겠냐"
뒤돌아보는 태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있지만, 언제나 흔들림 없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듯 안타깝게 흔들리고 있어 순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른팀이 맡게 할수는 없어. 형이 감식반에 이쪽으로 올 수 있는 인원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줘"
"그래, 알았다. 바로 알아볼게"
순범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인 태연의 눈길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입구에 서있는 지배인에게로
향한다.
"이 방은 지금부터 사건현장입니다. 다른사람이 출입할 수 없도록 각별히 주의 부탁드립니다."
"네? 아, 네"
"cctv 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ㄴ,네? 뭐라고 하셨죠?"
지배인은 이런일이 처음이라선지 멍하니 넋이 나가있었고, 보다못한 순범이 답답한듯 가슴을
퍽퍽 두드리고는 그의 팔을 잡고 복도로 이끈다.
"cctv 말이요! cctv!! 저기 저거!"
복도 끝 천장에 매달린 cctv 카메라를 가리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배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태연은 가만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정인이 어떤마음으로 이곳까지 왔을지를 생각하니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듯 침도 제대로 삼키기 어려워진다..
"미안하다.. 정인아.."
태연은 소리내어 정인의 이름을 부르며 두눈을 감았다. 감겨진 눈꺼풀 아래로 눈물을 삼키고 ..
한참만에야 떠진 태연의 눈에 저만치 구석에서 반짝이는 무언가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본 곳엔..
언젠가 그가 찾아주었던 귀걸이가 또다시 주인을 잃고 떨어져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에 끝끝내 배어나오는 물기를 손끝으로 꾹 눌러 닦으며 태연은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가슴속 깊이 내리눌렀다.
손안에 귀걸이를 꼭 쥐며 돌아서자, 걱정이 가득 담긴 순범의 눈길이 기다린다.
"그럼 부탁할게 형"
"어? 그래, 알았다.... 태연아. 유검 괜찮을거다. 강한여자니까 니가 찾으러 갈때까지
잘 버티고 있을거야. 그러니까 기운내라 알았지?"
순범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연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정인은 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강한여자라고 생각하는건..
어쩌면 정인이 이제껏 모든걸 참고 견뎌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형.. 정인인 그렇게 강하지 않을지도 몰라.. 내 상처까지 정인이가 감싸준건 .. 정인이가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착하고 여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
정인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지만 눈앞에 들어오는건 칠흑같은 어둠뿐이다.
등뒤로 단단히 묶인 손목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대체 누굴까? 누가 무슨 의도로, 무얼 바라고 날
납치한걸까.. 바보같다.. 그녀석에게 그렇게 당했으면서.. 멍청하게도 아무 의심도 없이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다니.. '
바닥에서 올라오는 얼음송곳같은 냉기에 손끝이 얼어붙는것 같다. 정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뭔가 보일줄 알았는데..
여전히 눈앞은 새카맣다...
' 민검사님은 내가 없어진걸 알고 있을까?... '
다.. 싫다고.. 아무생각도 하고 싶지않다고.. 멍하게 있기가 무섭게 태연은 정인의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오고야 만다...
정말.. 바보같다.. 그를 피해 도망쳤으면서.. 이런순간에 미치도록 그리운게 그사람이라니..
태연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당연한듯 눈가가 뜨거워진다..
눈물을 닦을 수도 없는데... 터져버린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정인은 입술을 꼭 깨문채 숨죽여 흐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울다보니 앉아있는것 마저 힘겨워진다.
정인은 쓰러지듯 얼음장같은 바닥에 다시 몸을 뉘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렇게 이별하려던건 아니었는데... 웃으면서 ..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보내주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흐느낌 섞인 작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정인은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정인이 다시 눈을 떴을때 그녀는 환한 빛속에 누워있었다.
"정신이 듭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링거액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며 정인을 내려다보고 있다.
"누구?... 어떻게 된거죠?"
"탈진증세를 보였지만 이제 괜찮을겁니다."
꿈을 꾸는걸까?.. 정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벽지도 페인트도 칠해져 있지 않은 회색의 벽.. 정사각형의 방 한쪽에 놓인 철제침대.
정인은 그곳에 누워있었다.
정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남자가 그녀의 시선 끝에 놓인 두꺼운 철문을 보며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쪽은 납치되어 왔고, 이곳에 갇혀있는겁니다. 알고 싶은게 그겁니까?"
정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는 우악스럽게 정인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아직 좀더 누워 있어야 합니다. "
정인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 누구야! 대체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내가 원하는게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뭐 그쪽을 데려온건 내가 아니라는것만 말해두죠.
나도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것 뿐입니다. 그럼 이만"
남자는 빙긋 웃어보이고 돌아선다. 정인은 재빨리 일어나 앉으며 팔에 꽂힌 바늘을
뽑아버리려고 했고, 남자는 마치 다 보고 있는듯 뒤돌아선채 말했다.
"그럴거 없습니다. 그냥 수액일 뿐이니까"
"내가 왜 당신말을 믿어야 하지?"
"믿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뭔가 나쁜걸 주사하려고 했다면 이미 했을지도
모르고.. 또.. 그쪽을 재워놓고 하는편이 훨씬 편할테니까요. 난 별로.. 번거로운건 싫어해서
말입니다."
여전히 정인에게서 등을 돌린채 말을 끝낸 남자는 어깨위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성큼성큼 철문앞으로 가 문옆에 있는 벨을 꾹 누른다.
곧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둘이 흰가운의 남자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문밖으로 한발짝 발을 떼던 남자가 멈춰서 정인을 돌아본다.
"아, 혹시해서 말인데.. 여긴 완벽하게 저희쪽 사람들 뿐입니다. 괜히 소리질러 봐야
기운만 빠질테니 그런짓은 하지마십시오. 그럼 또 보죠"
남자가 나가고, 두꺼운 철문은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정인은 침대시트를 잡아당겨 또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울어봐야 해결되는건 아무것도 없어. 정신차려 유정인.'
이를 악문 정인은 차가운 바닥에 맨발로 섰다. 그리고 링거대를 끌고 천천히 방 가운데로
걸어가 차분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환기구로 보이는 구멍이 천장에 있고, 남자가 나간 철문 외에 한쪽벽엔 목제로 된 문이 있다.
창문이 없어 이곳이 지상인지 지하인지, 밤인지 낮인지도알 수가 없다.
탈출은 꿈도 꾸지 말라는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는 정인의 표정이 한쪽 벽귀퉁이에 매달린 감시카메라에
다다르자 짜증스레 구겨진다. 원격으로 조종되는듯.. 침대를 향해 있던 카메라는 정인이
있는쪽을 향해 지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미친 변태새끼 같으니!"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정인은 목제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변기와 세면대.. 샤워커튼으로 가려진 욕조.. 세면대 옆 기다란 수납장 안엔 수건과
기초화장품, 세안제, 목욕용품 심지어 생리대까지 들어있다.
정인을 납치한게 누구든.. 그는 정인을 쉬이 놔줄 생각이 없는것이 분명해 보였다.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세면대에 의지한채 정인은 거울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 눈가는 눈물에 짓물러 빨갛게 부어있고, 입술은 메말라
갈라져 피가 맺혔다.
"민검사님... 민태연.. 태연씨.. "
태연씨..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테지..
거울속에 담긴건 제 모습인데.. 어째선지 입밖으로 나오는건 태연의 이름이다..
어쩔 수가 없다.. 생각나는건 오로지 그 이름.. 그 얼굴 뿐이니까..
메마른 입술새로 힘없이 몇번이나 새어 나오는 태연의 이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참았던 눈물이 하릴없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