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사랑..그 잔인한 이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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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라 좀 힘들긴 할테지만, 무슨수를 써서라도 꼭 유검이 있는곳을 찾아내겠노라고 순범은
태연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순범이 나간 후 한시간이 다되도록 망연자실 비어있는 정인의 책상앞에 앉아있던 태연이
무슨 생각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제 집무실로 들어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서울시내 호텔 전화번호를 모조리 검색한 태연은 그중에 정인의 집과 검찰청
에서 가까운 호텔의 전화번호들을 먼저 추려내 차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몇번째인지 모를 통화를 끝내며 힘없이 휴대폰을 책상위에 올려놓은 태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곳이고 한결같이 투숙객의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들로 유정인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지 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당연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미칠것처럼
절박하기만한 태연에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수십번 같은 말들을 되풀이한 통화는
절망감만 더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절망에 빠져 허우적댈수는 없다.. 아니, 그럴 자격조차 자신에겐 없다...
"제발.. 정인아..."
다시 집어든 휴대폰이 때맞춰 요란하게 울려댄다.
액정에 뜨는 '황형'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반가운적이 또 있었던가?..
< 찾았다 태연아! >
전화를 받자마자 들리는 순범의 숨찬 목소리에 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마음과는 다르게 아무말도 나오질 않아 태연 스스로도 당혹스럽다.
< 태연아? >
"ㅇ,어.. 형.. "
< 인마! 너 정신 않차려?! 유검 데려와야 할거 아니냐! >
순범의 호통에 그제야 찬물을 끼얹은듯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다. 태연은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들고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어디야?"
<ㅇㅇ동 xx호텔이란다. 신용카드사용 조회한거라 호수까진 알 수가 없고...일단 거기서 만나자.>
"알았어. 아, 형... "
< 그래. 왜? >
"고마워..."
< 쟈식.. 고맙긴.. 내가 남이냐? 유검은 나한테도 식구같은 사람이다. 그런소리 마라.>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태연의 머릿속은 유정인이란 이름과
얼굴로 가득했다. 정인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혜리에게 가는 제 옷깃을 붙들던 불안한
얼굴까지 하나하나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라 죄의식에 불을 붙인다.
태연은 이를 악물며 핸들을 있는 힘껏 쥐었다....
호텔앞에 대충 차를 세우고, 직원에게 차키를 던지듯 건넨 태연은 성큼성큼 호텔안으로
들어갔다. 저만치 프론트에서 직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순범의 모습을 보자 태연의 걸음은
조금 더 빨라졌다.
"형. "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순범의 표정에 잔뜩 불만이 서려있다.
"어 그래, 왔냐"
순범은 이제부턴 네게 맡긴다는듯 프론트 데스크 앞에서 한발짝 물러서며 태연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여기 유정인이란 여자분이 묵고 있다는걸 알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쪽분께도 말씀드렸지만 투숙객의 정보를 함부로 알려드릴 수 없는게 저희
입장이라서요. 정확한 확인도 않된 상태에선 .. 죄송하지만,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럼, 전화로 확인해 보시죠"
직원을 향한 태연의 말에 순범이 앞으로 나서며 잔뜩 걱정이 담긴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전화를 않받는단다.. 태연아.."
불안한 마음이 태연을 통째로 집어삼킬듯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태연은 안주머니에서 검사신분증을 꺼내 프론트직원에게 내밀었다.
"지금 유정인씨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몇홉니까?"
딱딱하게 굳어진 태연의 음성과 표정에 호텔직원은 주춤거리며 신분증을 확인한다.
저쪽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호텔의 지배인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재빨리
이쪽으로 다가오고, 태연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정인은 순식간에 검찰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증인신분이 되었다.
지배인은 잠시 머뭇거리는듯 했지만, 신분증을 확인했고, 정인이 위험에 놓여있다는 이야기에
결국 태연과 순범을 정인이 묵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앞에 도착해 지배인이 먼저 벨을 누른다.
지배인은 태연의 눈치를 살피며 두어번 더 벨을 누르지만, 안에선 아무 대답도,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불안한 눈으로 어쩔줄 몰라하던 지배인은 매섭게 문을 노려보는 태연의 눈빛에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태연이 세차게 문을 두드리며 정인의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안에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태연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순범이 지배인의 팔을 잡아 흔든다.
"이봐요 지배인양반, 그 뭐냐 보조,보조키 뭐 그런거 없수? 그렇게 멍하게 서있지만 말고 문을
열어서 아무일 없는지 확인을 해야 할거 아니요!! 확인을!!!!"
순범이 윽박지르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지배인이 전화를 걸고, 잠시후 직원이 카드키를
들고왔다.
지배인이 직원에게서 키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태연이 더 빨랐다.
빼앗듯 키를 받은 태연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연다....
그리고,
방안에... 그녀는 없다...
아무거나 잡히는대로 던진듯 커피포트와 작은쟁반, 여러종류의 차 티백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깨어진 유리잔의 파편들이 카펫위에 흩어져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방울들이
유리파편들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저만치 침대앞에 놓인 정인의 여행용캐리어만이..
그녀가 이곳에 있었노라고 아프게 말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또다시 세찬 빗줄기가 쏟아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