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 늦어서 미안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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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열흘간 세명의 여자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뉴스가 티비며, 신문.. 인터넷까지 도배하고 있다.
연쇄살인이라느니, 변태성욕자의 짓이라느니,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경찰에선 입을 다물고 있는가보다.
정인은 뉴스를 보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으슬으슬 한기가 드는걸 느낀다.
몇년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한때 검사였다고 직업병이 도지나 싶기도하고, 미국에서 공부한걸 이렇게 썩히고 있는게 아깝기도 하다.
좋은 내용의 뉴스도 아닌데다 듣고 있자니 왠지 스스로가 한심한 기분이 든다. 리모콘을 들어 다른때 보다 더 힘주어 전원버튼을 누른다.
때맞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탁자에 놓인 전화기로 손을 뻗는 정인.
"여보세요? 오빠?..."
재하에게서 걸려온 전화. 지금 데리러 올테니 준비하고 있으란다.
무슨일이냐 물어도 대답도 없고..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재하오빠니까 라고 생각하며 정인이 외출준비를
서두른다.
**
"정인아"
재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선채 정인을 부른다.
"유정인~!"
재차 부르는 소리에 정인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왜그래 오빠? 무슨일 있어?"
"가면서 얘기하자, 준비 다 했지?"
정인을 차에 태우고 휠체어를 접어 실은 재하가 운전석에 앉으며 안전벨트를 확인한다.
"어디가는거야 우리?"
"일하러"
"일? 무슨일?"
한껏 올라간 목소리톤을 들으니 일이라는 말에 흥미가 돋는게 분명해보인다.
"뉴스 봤지? "
"무슨 뉴스? 설마.. 그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여자 세명..? "
"그래. 그 사건. 경찰쪽에서 협조요청을 해왔어. 시신이 세구나 발견됐는데 이렇다할 단서가 없나봐. 그러다보니까
좀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 보는건 어떻겠냐는 소리들이 나온 모양이야"
"그래? 근데 나는 왜?.."
"혼자 하는거 보단 둘이 하는게 좋을거 같아서, 너도 전문가잖아? 왜? 싫어? 4년동안 죽어라 공부했던건데 하고싶지 않아?"
"하고싶어! 할께. "
아니나 다를까 금새 얼굴이 밝아지는 정인을 보니 재하의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렇게 좋냐? "
재하가 놀리듯 말하자 정인이 얼굴을 붉힌다.
"놀리지마"
"오랜만에 껀수 잡았는데, 이럴때 놀려먹어야지 언제 놀리라고 하지말래?"
"오빠!"
"알았어 알았어. 녀석, 발끈하기는"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야?"
"서울지경"
"지경? 벌써 그쪽으로 넘어간거야? 혹시.. "
"아직 몰라.. 그렇다고해도 당장 메스컴에서 달려들걸 염려해서 아직 쉬쉬하고 있는거 같고"
"그렇구나.. 오빠생각은 어떤데?"
"유정인 분석관님 아직 증거들도 못봤습니다~ 왜 이렇게 급해?"
"배운거 제대로 써먹을 생각하니까 좋아서 그런다 됐어? 칫"
정인이 무안한 마음에 토라진듯 쏘아붙이지만 재하는 정인을 향해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보인다.
***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로 바로 갈거라 생각했던 정인의 예상과 달리 재하는 청장실로 향했다.
청장은 전에도 재하를 만난적이 있는건지 과하다 싶을만큼 두사람을 반겨주었고, 덕분에 정인은 맘에도 없는 웃음으로
답하느라 얼굴에 쥐라도 날것 같았다.
이번 사건이 연쇄살인일 가능성이 높다는점. 현재 가진 증거로는 용의자조차 추려낼 수 없다는점.
이 두가지만으로도 이 일이 메스컴에 알려지게 되면 .. 분명 우리나라 경찰력이 어쩌고 저쩌고 해댈것이 분명했고,
만약 사건이 빨리 해결되지 않을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묻게될지 불보듯 뻔했다.
그러니 청장은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하와 정인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리라.
그는 두사람에게 필요한건 모두 제공하겠다며, 제발 용의자만이라도 추려내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청장실을 나와 재하를 기다리던 정인이 그가 나오자 피식 웃는다.
"오빠가 유명하긴 한가보다?"
"왜?"
"서울지경 청장님이 저정도로 하는걸 보니까 갑자기 막~ 오빠가 유능해보여서"
"실없기는"
재하가 정인의 머리를 헝클며 웃는다.
사건을 담당한 강력범죄수사2팀장을 만나 그간 나온 증거와 피살자 신분, 시신 발견당시 사진 등을 꼼꼼히 살펴본다.
"네 생각은 어때?"
재하가 증거사진들에서 눈을 떼며 정인에게 묻는다.
정인은 다시한번 고개를 숙인채 시신의 사진을 확인하며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있다.
이윽고 정인이 고개를 들었을때 들려온 노크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한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온다.
**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남자의 낯익은 모습.. 늘 그리움에 목메이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여기 강력범죄수사2팀 팀장님이 어느분이십니까?"
태연이 강력팀 팀장을 찾고 있다. 그가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본다. 그렇게 방안을 돌아..
그의 시선이 정인의 얼굴에 박힌다.
문이 열린 순간부터 지금 그의 눈과 마주친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정인의 시선이 태연의 그것과 얽혀버렸을때 .. 정인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놓쳐버렸지만..
그 순간 재하는 이 모든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서 정인의 곁으로 와 떨어진 사진을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태연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저곳에 앉아있는 여자가 정말 그녀인지조차 믿을수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뚫어질듯 정인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태연이 한발짝 발을 떼었을때..
방금까지 정인의 앞에 앉아있던 팀장이 태연의 앞을 막아서고 있다.
"접니다만, 누구시죠?"
"서울지검 검경합동특수수사부 민태연검사라고 합니다."
태연은 스스로도 어이없을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태연이 내미는 신분증을 확인한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태연을 쳐다본다.
"검사님이 여긴 무슨일로 오셨죠?"
"이번 사건 저희에게 넘어왔습니다. 위에 확인해보시죠"
잠시동안 무엇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서있던 팀장이 뭐라 욕설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꺼낸다.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태연의 시선이 다시 정인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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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태연임을 확인한 순간 정인은 이곳에 온걸 후회했다.
아직.. 아직은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길.. 그 시간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얻기를 기도했었는데..
하늘은 정인의 부탁에 거절의 뜻을 이런식으로 보여주는듯 했다.
온몸에 맥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이다. 들고있던 사진을 놓쳐버렸다.. 조금씩 손이 떨려온다. 정인의 커다란 눈은 더할수 없이 커져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게 보일만큼 커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할까?.. 하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런 순간에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곁으로 와서 사진을 줍고 저를 보는 재하에게 정인이 눈으로 묻고 있다.
'알고 있었던거야?.. 이 모든걸 미리 다 알고 있었어?.. 어째서.. 왜? '
재하는 그저 가득 안타까움을 담은 눈길을 정인에게 보낼뿐..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을 작정인가보다.
정인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끝내 넘치고 만다.. 시야를 뿌옇게 만들던 눈물이 흘러내리고 나니 다시 태연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렇게나 몸을 떨고 있으면서도 정인은 태연을 볼수 있다는게 기쁘다...
태연이 정인에게로 움직인다. 정인의 머리속에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태연과의 추억들이.. 혼자일때의 아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무슨 말로 용서를 빌어야할까....
강력팀 팀장이라는 사람이 태연을 막아선다.. 고마워해야 하는건가?.. 숨 돌릴 시간을 벌어준걸?
그런데..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를 막아선 저사람에게 화가 나는 이유가 뭘까..
누군가 잔뜩 화가 나서 소리 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정인의 눈엔 오직 태연만 보였고.. 지금 이 방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아주 먼곳에서 일어나는 일인양.. 그렇게 멀게만 느껴진다.
마치 이 공간에.. 이 시간에.. 지구상에 태연과 정인 단둘이 있는것처럼.. 방금.. 어느 순간부터 정인의 눈엔 태연 외에 그 어떤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의 눈이 다시 정인을 쫓는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이.. 자꾸만 차올라서 그의 얼굴을 가리는 몹쓸 눈물이..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보다 더 밉고 싫어진다.
'그의 앞에서 울수 있는 자격이.. 내게는 없는데.. 이런 눈물따위로 내가 그에게 준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리란걸 아는데..
내 어리석음이 그에게 주었을 아픔이 어떤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데.. 어떻게 ..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
팀장이 전화를 끊고 아직도 씩씩대는 숨을 고르지 못한채 태연의 앞에 선다.
"확인했습니다. 서류 바로 준비해드리죠. 아, 그리고 이쪽분들은 이번사건 도와주실 프로파일러 분들입니다. 뭐 어떻게 하실지는
알아서 하시고 .. 인사들 하시죠. 그럼 전 이만 빠지겠습니다. 서류는 좀 이따 저친구가 가져다 드릴겁니다."
그는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태연을 향해 일방적으로 말하고 휙 나가버린다.
그가 나간 문쪽을 한번 확인한 태연이 다시 정인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태연을 제지하듯 재하가 먼저 앞으로 나선다.
"잠시, 저한테 먼저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재하의 말에 태연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누구시죠?"
"아.. 전 이재하라고 합니다. ㅇㅇ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가르치고 있고, 이번 사건에 프로파일러 자격으로 합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구요.
그리고... 정인이와는 남매같은 사입니다. 유원국씨는 제게도 아버지 같은 분이시니까요."
자신을 정인의 오빠라고 소개해야 하는것이 못내 아쉽고 가슴 아픈 재하였지만.. 정인을 태연과 만나게 해줘야 한다는 결정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민태연 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쪽과 할 얘기는 없을것 같습니다만"
태연은 지금 복잡한 심정이다. 정인이 살아있다는것이 반갑고 고마운 반면, 그녀가 거짓죽음을 빌어 제게서 달아난것이 화가난다.
어서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고싶은 지금, 갑작스레 이 남자가 제 앞을 막은것에 주먹쥔 손이 떨려온다.
지난 4년간 그녀를 그리워한 마음이 비수가 되어 저를 찌르고 있다.
"말씀 드렸다시피, 정인이는 제게는 친동생같은 존재입니다. 저 얼굴을 보셨잖습니까..제가 먼저 조금이라도 설명을 할수 있도록 해주시죠.
부탁드립니다"
정인은 울고 있다.. 그럼에도 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채.. 소리없이 통곡하고 있다.
태연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감는다. 잠시후 감았던 눈을 뜨며 정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재하를 본다.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