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y L'amant/Bloody
태연정인 - 늦어서 미안해 24
Carna
2013. 12. 31. 17:23
***
아쉽고 아픈 재하의 마음도.. 정인을 놓쳐버릴까 불안에 떠는 태연의 마음도..
어렵사리 되찾은 사랑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몰라 서글픈 정인의 마음까지..
시간은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는듯 너무도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정인의 수술이 바로 하루 앞으로 다가오고..
오늘 태연은 정인의 앞에서 힘겹게 말을 꺼내기로 한다.
노크소리.. 창가에 앉아있던 정인이 휠체어를 돌려 문쪽을 바라본다.
"새삼스럽게 왜 노크를 하고 그러세요?"
안으로 들어와서도 문가에 선채 정인을 보고만 있는 태연.
"왜 그러고 서있어요?.. 겁나게.."
"겁나?.. 왜?"
"민검사님이 잔뜩 무게잡고 있으니까.. 분명히 무슨 할얘기가 있는걸테고.. 어려운 얘길테니까.."
태연이 피식 웃으며 다가와 정인을 안아 침대에 앉혀준다.
"유정인 귀신이네.. "
이불을 끌어 덮어주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정인의 머리를 쓸어넘겨준다.
"그쵸? 나 이제 민검사님 얼굴만 딱! 봐도 웬만한건 다 안다니까요"
내일이 수술이라 겁이 날만도 한데.. 생글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는걸 모르지 않는다.
"내일이네.. 수술"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태연의 손위로 제 손을 겹친다.
"정인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태연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표정 하지 마요.. 아무일 없을거에요.."
도리어 저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려는 정인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인다..
"왜그래요.. 좀 웃어봐요. 환자한테 용기를 북돋워줘야죠"
태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든다.
"정인아.. 지금부터 하는 얘기 잘 들어...."
"나 원래 민검사님 얘기 잘 듣는데.. 무슨말인데 그러세요.."
"난.. 정인아.. 난 널 다시 잃고싶지 않아.. 아니 그럴 수가 없어... 만약 만에 하나 네가 잘못되면... 난 도저히..도저히
견딜 수 없을거야. 그러니까 정인아.. 만약 만약.. 수술이 잘못된다면...."
이쯤이면 태연이 무슨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술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나 힘겨워하는 태연의 모습에 정인의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는거에요?.. 아님 그냥 민검사님 결정을 제게 알려주는 거에요?"
"정인아..."
어쩌면 정인의 마음은 상관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정인을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제 결정을 그녀에게 강요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연의 그 모든 마음을.. 생각을... 알고 있다는듯 정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괜찮아요.. 민검사님이 어떤 마음인지.. 나 다 아니까.. 나도 민검사님 곁에 있고싶어요.. 어떤 댓가를 치루던..
무슨 방법을 쓰던지.. 하지만.. 달라진 나를 보는 매일, 매순간마다 민검사님이 죄책감에 괴로워하게 될거란것도 역시..알아요.
그리고..... 난 그런 민검사님을 볼 자신이... 없어요.. "
정인의 말이 맞다. 아마도 그럴테지.. 그녀를 바꿔놓고.. 제 곁에 머물도록 하는 대신 태연은 남은 시간을 정인을 보며
죄책감을 가질테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괴로워할지 모른다.
"난 왜 이렇게 민검사님한테 짐만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고싶지 않은데.. "
"아니야 정인아. 그런 생각 하지마.."
"내가 아픈건 민검사님 탓이 아니에요. 그거 .. 알죠?.. "
태연의 대답을 기다리는듯 정인은 말없이 손을 들어 태연의 뺨을 어루만진다.
태연이 고개를 끄덕일때까지 기다리던 정인이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태연이 고개를 끄덕일때까지 기다리던 정인이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미리 생각하진 말아요 우리.. 만에 하나 수술이 잘 안되면.. 그 다음은 민검사님한테 맡길게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게 당신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없다는거 아니까.. 그치만 한가지만요......어떤 상황이 오든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게 날 위한거란거 알아요. 내가 알고 있으니까 괴로워하지도 말고, 미안해 하지도 말아요. 약속해줘요."
"그럴게.. 약속할게..."
"고마워요. 이제 그만해요... 민검사님이 이렇게 눈물 많은 남잔줄 몰랐는데.."
태연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주며 정인이 살짝 눈을 흘긴다. 그 모습에 졌다는듯 태연이 웃어버린다.
"걱정말아요. 괜찮을거에요. 나 이래뵈도 꽤 강하다구요. 나 믿죠?"
태연이 정인을 품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믿어..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아무데도 가지말고.. "
"응.. 알았어요.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딱 붙어 있을거니까 걱정마요."
끝까지.. 태연은 정인에게 위로받는다. 정인의 마음을 몰랐을때에도.. 정인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닫고 그렇게나 밀어내기만 할때에도..
정인은 태연의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해주었다. 아니.. 그저 곁에 있는 .. 언제고 그렇게 제 곁을 지켜주는 정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태연에게 위로가 되었다.
정인이 위로받아야할.. 그것이 마땅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
조금만.. 조금만 더 늦게 떠오르길 바라던 태양은 오늘따라 더 서둘러 유리창을 두드린다.
좁은 병원침대에서 저를 안고 다독여주던 태연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웠나보다...
"불편했죠?.. 미안해요. 괜히 고집부려서"
"하나도 안불편했어. 너야말로 불편하지 않았어?"
정인이 고개를 젓는다. 그의 품이 너무 좋아서.. 차갑고 서늘한 그의 체온과는 다르게 그 품은 너무 따스해서 수술을 앞두고 불안했던
제 마음도 노곤해졌다. 그래도 아직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것이 부끄러워 금새 얼굴이 붉어지는것 같다.
태연이 무언가 생각난듯 서둘러 병실을 나가고 난 후에도 정인은 한동안 멍하니 뜨거워진 얼굴을 두드린다.
잠시후 태연은 딱 기분좋을만큼 따뜻한 물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게 뭐에요?' 하고 묻는 정인에게 '이렇게 얼굴 좀 내밀어봐' 한다.
태연이 정성들여 정인의 얼굴과 목, 손까지 닦아주는 동안 정인은 쿡쿡거리며 웃음을 참는다.
"자꾸 웃을래? 이러는 나도 아무렇지 않은건 아니거든?"
"ㅋㅋ 알았어요. 그러게 뭐하러 이래요. 그냥 나한테 주면 될걸"
"생각같아선 공주님처럼 받들어 모시고 싶은데.. 내가 워낙 그런 성격이 못되니까.. 너한테 너무 해준게 없어서 미안하다..."
괜히 잔뜩 심각해진 태연을 보며 정인은 괜스레 울컥 눈물이 날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인다.
기껏 닦아줬더니 왜 눈물바람이냐며 태연이 정인의 얼굴에 생긴 눈물자욱을 수건으로 꾹꾹 누른다.
"나 다 나으면 공주님 받들듯 해줘요. 그럼 되잖아요. "
"그래, 그럴게.. 꼭.."
어제부터 갑자기 빨라진것 같은 시계바늘이 어느새 수술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알려준다.
노크소리..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온다..
간호사의 손에 들린 수술용 링거바늘은 보통의 그것보다 굵다.
정인의 창백한 피부 아래 푸르스름하게 혈관이 다 비치는것 같은데.. 간호사는 혈관이 잘 안나온다며
한참을 정인의 팔을 붙들고 씨름을 한다.
한참을 정인의 팔을 붙들고 씨름을 한다.
두툼한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 정인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진다.
간호사가 나가고 나니.. 이제야 수술을 해야 한다는게 실감나는건지 정인은 자꾸만 떨려오는 몸을 이불속으로 밀어넣는다.
얼마후 선영이 들어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정인이 수술실로 옮겨져야할 시간이 된다.
수술실 앞.. 정인이 잠깐만 기다려 달란다.
제 손을 꼭 잡은 태연의 손을 잡아당기자, 태연이 몸을 숙여 정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정인이 태연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사랑해요.. 민검사님.... 제대로 말한적 없는거 같아서.."
태연이 아픈 표정으로 눈을 꾹 감았다 뜬다.. 그리고 정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사랑한다. 유정인"
오래전 제가 태연을 사랑하기 시작한때.. 그는 늘 그렇게 성까지 붙여 딱딱한 말투로 저를 부르곤 했었다.
새삼 태연을 사랑해온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고마워요.. "
정인이 누운 침대가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고.. 굳게 닫힌 문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태연은 앉지도 못하고 그앞을 서성이고 있다.
원국은 병원밖에서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태연의 예상대로 재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해를 넘기고.. 몇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햇살이 따스한 초여름의 어느날.. ..
오래전 비어있는 관이 묻혔던 그 무덤앞... 태연이 그곳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