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 늦어서 미안해 2
***
서울 부암동 주택가
검은세단이 그중 한 주택안으로 들어간다.
넓직한 마장 한쪽으로 마련된 주차공간에 세워진 차안에서 내린 남자가 휠체어를 꺼내고 있을때
집안에서 누군가 달려나오고있다... .
.
남자는 휠체어를 잘 펴서 고정시켜두고 안에서 달려나온 '유원국'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그래. 재하야"
남자의 인사를 받고는 있지만 원국의 신경은 온통 차안에 앉은 여자에게 가있다.
재하라고 불리운 남자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차안에 앉은 여자를 안아 휠체어에 앉혀준다.
"아빠.."
"정인아!"
딸의 얼굴을 확인한 원국이 눈물을 훔친다.
"이녀석아. 어째 지나번 봤을때보다 더 마른게냐"
"전 괜찮아요. 마르지도 않았구요. 아빠야말로 살이 빠지신거에요?"
"나이 들면 다 그런게지 뭘.. 들어가자꾸나"
원국은 정인의 휠체어를 밀어 안으로 들어가고 재하가 두사람의 짐을 챙겨들고 뒤따른다.
집안은 정인이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문턱을 없애고, 휠체어로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공사가 모두
끝난 상태다.
"어떠냐?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일부러 단층집으로 구했다만"
"좋아요. 고마워요 아빠"
"나와 함께 지내는게 좋지 않겠니? 다시 생각해보렴"
"제가 죽은줄 아는사람들.. 있잖아요. 그냥 여기서 지낼게요. 재하오빠도 있잖아요."
원국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냐.. 정 그러면 어쩔수 없다만..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다오. 알았지?"
"그럴게요"
"저쪽이 정인이 네 방이다. 여기 김실장이 앞으로 집안일부터 여러가지 도와줄거야."
원국의 곁에 서있던 김실장이라 불린 여자가 살짝 고개숙여 인사하고, 정인과 재하도 그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그럼 우선 좀 쉬렴. 오래 비행기 타고 오느라 둘다 피곤할텐데.. 난 이따 저녁에 다시 들르마"
원국이 정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고 뒤돌아선다.
"아빠"
정인의 부름에 원국이 돌아본다.
"감사해요.. 죄송하구요.."
원국은 말없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현관을 나서며 떠올린다.
정인이 미국으로 가기전 몇번이나 스스로 손목을 그었던 일을...
이렇게 살아서 눈앞에 있어준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를.....
**
정인의 방.
짐을 내려놓고 나가려는 재하를 부르는 정인.
"재하오빠"
"왜? 뭐 필요한거 있어?"
"아니.. 잠깐 여기 앉아봐.."
재하가 의자를 당겨 정인의 앞에 앉는다.
"나.. 부탁이 있어.. 아빠한테는 비밀로해야 하는건데..해줄수 있어?"
재하는 낮은 한숨을 내쉰다.
"그 부탁이라는거 아까 공항에서 본 남자에 대한거야?"
정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그사람에 관한거야.. 해줄꺼야?"
"많이 힘들어하지 않을 자신 있어?.. "
"그냥.. 그사람이 잘 지내는지만.. 이제 괜찮은지.. 나.....다 잊었는지... 알고싶어"
"알고나면? 그 다음은 어쩔껀데?"
잠깐 망설이던 정인이 고개를 젓는다.
"뭘 어쩌자는거.. 아니야. 그냥 알고싶은거지... "
"약속 하나 해. 그럼 알아봐줄께"
"약..속?"
"만약. 그 사람이 다 잊었으면.. 그럼 너도 더이상 미련 갖지말고 정리한다고 약속해"
"오빠..... 그건.."
"그렇지.. 어차피 무리라는거 안다.. 젠장.. 알아봐줄께"
재하는 정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방을 나간다.
방문을 닫고도 걸음을 떼지 못하는 재하의 등뒤로 들리는 정인의 흐느낌...
알고있다.. 정인이 꿈에서도 잊지못하는 사람이라는걸.. 그 그리움이 얼마나 크고 아플지를...
***
정인의 묘.
태연이 손에 하얀장미 한다발을 들고 그 앞으로 걸어간다.
정인의 묘석에 가까이 다가간 태연이 앞에 놓인 무언가에 놀라며 주위를 둘러본다.
"누구지?..."
가져다 놓은지 얼마 안돼보이는 검붉은색의 장미 한다발..
검은빛이 감도는 붉은 장미가 회색의 묘비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원국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날 이곳에 그녀를 묻은후.. 그녀의 기일에도 생일에도.. 단 한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왔다 간걸까..
의문의 장미를 바라보던 태연이 정인의 묘석에 손을 얹고, 쓸쓸히 웃으며 말한다.
"누가 왔었는지 말해줄래? 설마 그 사이 딴남자라도 생긴거야?.. "
정인의 묘앞에 앉은 태연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묘를 쓰다듬고있다.
"정인아.. 거긴 지낼만 하니? 춥진 않아?..아프진 않고?.. 난 죽어서도 너한테 갈수 없겠지?..
보고싶다.. 유정인.. 보고싶어서 미칠것 같다.. 정인아.."
태연이 그리움을 토해내고 있던 그때... 저만치 나무아래 그림자를 만들고 있던 재하가 뒤돌아
차안에 앉은 정인에게로 간다.
"출발하세요."
정인의 곁에 앉은 재하가 기사를 향해 말하고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묘지를 벗어난다.
"두고왔어?"
정인의 떨리는 목소리.. 거기엔 필시 눈물이 섞어있다는걸 재하는 알고 있다.
재하의 대답을 기다리던 정인이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걸 묻는다.
"누가 와보긴 하는거 같아?..너무 쓸쓸하진않아?"
"무덤이 쓸쓸한게 당연한거 아니야?"
"오빠.... 그렇게 말하지마.. 난 나한테 미안해지는 중이니까.."
재하가 정인의 어깨를 감싸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록 한다.
"좀 자.. 너 어제도 한숨도 못잤잖아"
"어떻게 알아?..."
"너 훌쩍거리는 소리가 내방까지 들리더라"
"그랬어?.. 미안.."
"됐으니까, 잠이나 자"
"응..."
감겨진 정인의 눈에서 기다렸다는듯 눈물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