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정인 - 늦어서 미안해 1
***
"태연아.. 그만 가야지.."
순범의 목소리에 뒤돌아보자.. 그 뒤로 저만치 울다 지쳐 주저앉은 동만이 보인다.
"동만이 데리고 먼저 가. 형.. 난 조금만 더 있다 갈께.."
순범은 한숨을 내쉬며 태연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후.. 알았다. 차에서 기다릴께. 잠깐만 있다가 와라.."
"아냐 형. 그냥 먼저가. 피곤할텐데 가서 쉬어."
"야 태연아.. 너 인마.. 얼굴이.... 후... 그러다 너까지 어떻게 될까 겁난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있다가 내려와라. 어? 차에서 기다린다. 알았지? "
태연은 대답이 없다. 순범이 다시한번 깊은 한숨을 뱉고 돌아선다.
주저앉아있는 동만을 일으켜세우는 순범.
"가자 동만아. 일어나 인마."
"유검사님.. 유검사님.. 으흑"
정인을 목놓아 부르는 동만의 모습에 순범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가자고 인마! 얼른 못일어나?!"
순범이 억지로 동만을 일으켜 세우고.. 동만은 내려가는 내내 수없이 뒤를 돌아본다..
.
.
두사람이 떠난후 정인의 묘를 바라보고 있던 태연이 스르륵 무너지듯 주저 앉는다.
정인의 앞에 무릎꿇은 태연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유정인... 정인아.... 정인아... "
태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정인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을 적신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인아...."
정인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태연은 다시한번 그날을 떠올린다...
태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 잠시 뒤돌아섰을뿐인 그때....
정인은 태연에게로 향한 총구를 막아선다.
찰나에 들린 두발의 총성과 함께 쓰러지는 정인의 가냘픈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쓸 틈도 없이 정인의 등뒤를 적시던 붉은선혈이 너무도 선명하다..
수술실로 들어가던 순간에도 힘겹게 웃어보이며 자신을 안심시키려 애쓰던 그녀의 얼굴..
태연은 그런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후 원국은 정인을 그의 조직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딱 한번 잠들어있는 정인의 얼굴을 본후..
절대 안정이라는 명목하에.. 그녀의 부고를 듣던 그날까지도 태연은 정인을 볼수 없었다.
태연을 대신해 정인이 목숨을 잃었다 생각해서일까... 유원국은 딸의 시신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점점더 커져가는 마음속 정인의 자리를 깨닫고.. 어렵게 어렵게 그녀를 받아들이고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이제야말로 정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신이 있다면 부디.. 그녀를 사랑하는 제 마음을 용서해달라고 애끓는 기도를 했건만..
너무도 갑작스럽게 맞아버린.. 정인의 죽음..
그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린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내야 하는날... 오늘....
이제 특검팀 사무실엔 그녀의 자리가 없어질테고..
다시는 햇살같던 그녀의 웃음을 볼수 없을것이다.
유정인이란 이름을.. 그녀의 얼굴을..목소리를 가슴속에 묻어야하는 날..
태연은 그렇게 날이 저물도록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
정인을 가슴에 묻은지 4년이 흘렀다.. 햇수로 5년의 시간..
정인의 묘석 옆 화병에 탐스러운 하얀장미를 꽂는 태연의 손길이 이제는 꽤나 익숙해보인다.
매년 정인의 생일과 기일.. 보통은 한달에 한번이상.. 태연은 이곳을 찾는다.
이제는 초록 잔디가 덮인 정인의 묘에 태연이 등을 기대어 앉는다.
"나 왔어 정인아. 자주 못와서 미안해. 요즘 좀 바빴거든.. 이해하지?"
태연은 마치 살아있는 정인에게하듯..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녀의 생전에 함께하지 못한 제 스스로를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던 태연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나온다.
"최동만 이녀석 이번에 정규직 됐어. 정인아 잘됐지? "
태연이 전화를 받고..짧은 대화를 나눈다.
알았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태연이 무덤을 향해 미안한듯 웃어보인다.
"정인아. 나쁜놈 잡으러 가야겠다. 하필 오늘 나타났다네.. 미안. 나중에 다시 올께...
사랑한다 정인아... 아직은 날 용서하지마.."
곁에있을때 그토록 듣고싶어했던 사랑한단 말을 이제야 해주는 자신을 그녀가 용서하지 않기를
바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린다.
**
태연이 차에 시동을 걸며 동만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공항에 있는거 확실한거야?"
"네. 좀전에 공항 cctv에 잡힌거 확인했어요."
"알았어. 계속 확인해보고 문제 생기면 연락해"
전화를 끊은 태연이 속력을 높인다.
**
공항에 도착한 태연이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가다 그만 안쪽에서 나오던 휠체어에 부딪힐뻔 한다.
순간 깔끔한 수트차림의 남자가 휠체어 앞을 몸으로 막아서고.. 태연은 휠체어와 충돌하는 대신
남자의 어깨에 부딪힌다.
휠체어의 주인은 여자인듯.. 남자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핑크색의 하늘거리는 스커트자락이 말해주고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남자는 여자의 안위를 먼저 묻는다. 리본이 달린 챙넓은 모자가 까딱 움직여진다. 그녀가 괜찮다는걸 확인한 후에야 남자는 태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괜찮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태연이 안으로 들어간 후 휠체어에 탄 여자는 그가 사라진쪽으로 고개를 돌려 태연의 뒷모습을 본다.
"괜찮아?"
"응.. 괜찮아.. "
"정말 괜찮은거야?"
"아니.... 운명의 장난이라기엔.. 너무한거 같네.."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휠체어를 움직이지만.. 여자는 고개를 한껏 돌려 이미 한참전에 사라저버린 태연의 뒷모습을 찾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