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량하게 비를 뿌려대는 흐린 날씨만큼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힘겹게 끌어안고 태연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어? 민검. 부장검사 호출 받고 갔다더니 이제 오는...."
그 답지 않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비까지 맞고 돌아온 태연의 모습에 순범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태연아. 너 무슨일 있었냐? 어?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흐트러진 모습이야 밖에 나갔다 비를 만나 그렇다쳐도 태연의 눈빛이 저렇게나 흔들리는걸 보는일은 그를 오래 알아온 순범으로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놀라는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걱정어린 순범의 물음에도.. 어깨에 올려지는 투박하고 따스한 손길에도 태연은 마치 딴 세상에 있는것처럼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곳을 향해 있었고.. 그 끝엔 그 만큼이나 흔들리는 또다른 눈동자가 있었다.
울었던걸 들킬까 싶어 책상위에 놓인 서류철 속으로 빨려들어갈듯 고개를 파묻고 있던 정인이었지만, 문이 열리는 기척엔 저도 모르게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정인은 제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눈이 마주칠때면 표정 조차 지워버리던 태연이.. 서글픈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채 흔들리는 눈동자 가득 저를 담고 있었다.
태연의 눈빛이 너무 아파 보여서.. 아니.. 어쩌면 이미 울고 있는것처럼 보여서.. 정인은 무슨일이냐고 묻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위태로워 보이는 태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정인은 울지 않는 그를 대신해 소리없이 눈물을 떨궜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건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짧았지만.. 두사람에겐 결코 짧지 않았던지..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의 눈빛에 담긴 슬픔을 알아보았고.. 그 때문에 안타까워했다.
다만 .. 다른것이라면..
태연은 정인의 슬픔이 저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뜻 다가설 수 없는 것이었고, 정인은 태연이 흔들리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가기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태연의 이름을 부르는 순범의 목소리와 정인의 눈물에 놀라 정인을 부르는 동만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는
것으로 그렇게 멈춰버린것 같았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태연은 힘겹게 정인의 눈물을 외면하고 순범을 향해 별일 아니라는 짧은 대답을 하고 도망치듯 집무실 안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정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흘러내린 눈물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애써 담담한척 먼지 탓을 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황형사님. 민검사님한테.. .."
먼지가 들어갔다면서 여전히 떨어질듯 눈물을 매단채 금새 엉엉 울어버릴것처럼 코끝까지 빨개져서는 태연을 걱정하는 정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내가 가볼테니까. 너무 걱정말아요 유검."
순범은 창백한 정인의 얼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동만을 불러 정인에게 따뜻한 차 한잔 가져다 주라고 챙긴 후에야 태연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마음 같아선 순범을 들여보내는게 아니라 직접 들어가서 묻고 싶었다.
무슨 일이냐고.. 어째서 그렇게 슬픈 얼굴인거냐고..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휘청거리게 만드는거냐고.. 아니.. 그보다는 더 직접적인
질문이 필요했다.
그날의 일 때문이냐고.. 나를 구해낸 댓가를 당신이 치르고 있는거냐고...
태연의 마음을 알리 없는 정인은 그것이 그를 아프게 하는줄도 모르고 그렇게 한번 더 그에게서 멀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다.
**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제 얼굴을 바라보는 순범의 시선에 가슴속에 가둬둔 아픔을 쏟아낼것 같아 태연은 등을 돌려버렸다.
"유검 때문에 그러는거냐.."
순범의 한숨섞인 질문에 태연은 눈물을 참듯 이를 꽉 문채 두눈을 감아버렸다.
"그런거 아니야.."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털어놔 버리면 정말 무너져버려서 두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것 같았다.
"내가 널 봐온게 몇년인데, 그걸 모르겠냐.. 대체 뭐가 문젠지 나는 모르겠다. 유검이 너 생각하는 마음이야 애틋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한거 알고, 니 마음도 다르지 않은거 같은데 그냥 털어놓으면 안되겠냐? "
"내 인생이 어떤지 형이 더 잘 알잖아.. 겉으로만 보통 사람인척 사는 이런 거짓투성이 삶에 정인일 끌어들이면.. 그래.. 어쩌면..
지금 당장은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결국은 지치게 될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
그럼 유정인은 다 버리고 훌훌 떠나버리게 될까..? 아니.. 저 바보같은 여잔 날 혼자 남겨두는게 미안해서 그것도 못할거야... "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왜 미리 걱정하는거냐고 말하고 싶어도.. 순범은 태연이 걱정하는게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것 같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참만에 순범은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니 마음이 어떤지는 충분히 알겠다만.. 그래도 태연아.. 니 마음이 유검이랑 같다면 말이다..
난 유검한테도 기회를 줘야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봐온 유정인이라는 여자는 동정심이랑 사랑을 구분 못하는 바보는 아닐거다.
유검이 니가 가진 비밀을 알게되고 그래서 언젠가 힘들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때가 되서도 널 떠나지 못한다면..
그건 너한테 미안하거나 널 가여워해서가 아니라, 널 그만큼 사랑해서일거다."
그 말을 끝으로 순범은 태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 집무실을 나왔다.
곧바로 자신에게 향하는 걱정 가득한 정인의 눈빛을 보며 순범은 그녀가 결코 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태연의 비밀스런 삶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분명 정인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확신했고, 부디 태연 역시 그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더욱 간절해졌다.
***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특검팀의 네사람은 각각 다른 의문과 고민들로 골머리를 앓았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퇴근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퇴근하라는 말만 남기고 태연은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숨막히는 사무실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던 동만은 제일 먼저 가방을 챙겨들고 도망치듯 꽁무니를 빼버렸고, 순범은 느릿하게
움직이며 태연과 정인의 기분을 살피다 한숨을 몇번 내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두사람이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정인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태연은 정말 괜찮은걸까..? 어째서 그렇게 아픈 표정으로 저를 보았던걸까..? 왜냐고 물어봐야 하는걸까..? 아니면.. 모르는척
묻어두는게 맞는걸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정작 정말로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라면
'오늘 무슨일 있으셨어요? , 아무일 없는거죠? , 괜찮으세요? ' 정도 일거다. 아마 그마저도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입술이 딱 붙어버려 꺼내지도 못할게 뻔하지만 말이다.
그렇대도 이대로 집에 가면 결국 밤새 잠 한숨 못자고 뒤척일게 뻔히 보이는듯 해 정인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두눈을 꾹 감아버렸다.
"안가고 뭐해?"
귓가를 울리는 낮은 음성에 화들짝 놀란 정인이 눈을 뜨자, 소리도 없이 언제 나온건지 태연이 책상앞에 서 내려다보고 있다.
"ㄱ,가야죠.. 지,지금 퇴근 하시게요?"
갑자기 말더듬이라도 되버린건지 멍청하게 더듬거리는 바보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짜증이 나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안갈꺼야?"
두어걸음 걷다말고 뒤돌아서 저를 부르는 태연의 목소리에 정인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나 그의 옆에 섰다.
아직도 묻고 싶은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나란히 선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정인은 힐긋 곁눈질로 태연을 훔쳐보았다.
반나절만에 까칠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릿하다. 그런데 그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이유중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형용할 수 없을만큼 마음이 아파 숨이 막힐것 같았다.
이러다 그 앞에서 눈물이라도 떨구게 될까봐 정인은 두눈에 잔뜩 힘을주고 고개를 푹 숙인채 발끝만 노려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시간이 흐르고는 있는건지.. 주변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할만큼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정인은 갑작스레 제 손목을 잡아 끄는 태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활짝 열려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막 닫히려는 찰나 태연이 급히 버튼을 누르고 정인의 손목을 잡은것이다.
그의 앞에서 또 바보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자괴감에 빠져 울상이 되어서도 정인의 신경은 온통 그에게 잡힌 손목에 가있다.
차가운 손안에 잡힌 손목은 데일듯 뜨거웠고, 심장은 튀어날올듯 요란하게 뛰어댔다.
"차 몇층에 세워뒀어?"
정인의 손목을 꼭 잡은채로 태연은 무심하게 물어온다.
"ㄴ,네? 아.. 오늘 차 안가져 왔어요.. "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1층 버튼을 꾸욱 눌렀다.
"데려다줄께"
태연은 정인이 눌러놓은 1층 버튼을 다시 누른다.
"네?..괜찮은데.."
싫다는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것처럼 제 얼굴은 보지 않는 태연의 옆모습을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던 정인은 손목을 잡은 태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끼고 고개를 떨군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한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손끝이 닿는것 만으로도 심장은 이토록 맹렬하게 반응해버린다.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고개를 더 숙여보지만 이미 차오를대로 차오른 감정은 방심한 틈을 타 넘쳐버리고 말았다.
**
오후 내내 정인이 무엇을.. 누구를 걱정하고 있었는지는 태연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걱정거리를 던져준것이 그 자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다가갈 수는 없었다.
마음은 당장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비상계단이든 옥상이든 어딘가 인적이 드믄 곳으로 데리고 가
터질것 같은 지금의 감정을 모두 털어놓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잘난 이성은 그래서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이성과 감정의 경계만 넘나들고 있는 중에도 그의 시선은 줄곧 정인을 쫓아 움직였다.
퇴근시간을 넘기고 순범과 동만이 사무실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는 정인을 보는것은 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꼼꼼히 내려진 블라인드 너머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굳이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고, 뜻하지 않게 알아버린 그녀의 결심이..
어쩌는 수 없이 그녀 스스로 내려버린 그 결정이 얼마나 그녀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지 또한 태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태연은 그를 붙드는 이성의 외침을 애써 무시해버리고 그녀의 앞에 서고 말았다.
흔들리는 정인의 마음을 알고나서 그녀와 사이에 열심히 쌓아올린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걸 느꼈고.. 태연은 그렇게 제 안에 담긴
마음을 순간이나마 정인에게 내보이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얼마나 더 복잡하게 만들었을지 뻔히 알면서도 비겁하게
숨어버린 스스로가 한심했고, 죽을만큼 미안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그녀의 생각을 다른곳으로 돌려보려는 의도였다.
그런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하지만..
둘만 남은 공간.. 나란히 선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둘을 둘러싼 공기는 짓궂게도 마법을 부리고 만다.
언제나 그렇듯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정인은 당황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안그래도 큰 눈은 더 커지고, 그 안에 담긴 말간
눈동자는 쉼없이 흔들린다. 그안에서 마주하게 되는건 두려움이기도 했고, 설렘이기도 했다.. 때로는 그녀 자신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묘한 기대감 같은것일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태연은 그 까만 눈동자 안에 담기는 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좋았다.
정인의 눈동자가 세상가운데 온전히 저 하나만을 담아내고 있을때만큼은 그 역시 평범한 한 남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정인을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다 문이 다시 닫히려는걸 보고,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버렸다. 제가 이끄는대로 끌려오는 정인을 보며 이제 그만 놔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연은 가냘픈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놓고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영원히 제 곁에 이렇게 붙들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말이 반갑기까지
했다.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질것 같은 그녀를 손안에 꼭 잡은채 태연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정인에게 향하는
시선을 어쩌지 못하고 있을때 태연은 보았다. 푹 숙여진 정인의 고개 아래로 후두둑 바닥을 적시는 물방울들을..
차라리 화를 내면 좋을것을.. 네까짓게 뭔데 날 이렇게 흔들어 놓는거냐고 화내며 소리라도 치면 좋을텐데.. 정인은 또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 내가 또 너를 울린거니.. 내곁에 있으면 넌 항상 우는구나.. 네 눈물에 내 가슴이 이렇게 찢어질것 같다는걸 말해주면 ...
그러면 넌 뭐라고 할까.. 나때문에 또 다치고.. 위험하게 되더라도 아마 너는 괜찮다고 하겠지.. 그리고 결국.. 또 울게되겠지..'
***
차에 탄 후로 두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 계속되었다.
정인은 자꾸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막아보려 하얗게 질리도록 입술을 깨문채 간간히 제게 와닿는 태연의 시선을 피해
창밖만 바라봤다.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가 차창에 부딪혀 부서진다.. 아무리 부딪혀봐도 열리지 않는 그의 마음에 조각난
제 마음처럼.. 그렇게 부딪히고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빗방울에 정인의 마음에도 멍이 들것 같았다..
정인의 집앞에 도착했을땐 빗줄기는 더 거세지고 있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
태연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꾸벅 인사를 한 정인은 아파트 입구까지 뛰어갈 작정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또다시 태연에게 반대편 손목을 잡혀버린 정인은 놀라 숨을 삼킨채 굳어버렸다.
"내리지 말고 잠깐 있어."
태연은 문을 열고 빗속으로 걸어나가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 조수석으로 와 문을 열었다.
왠지 모든것들이 현실이 아닌것처럼 흐릿해서 정인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못하고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저를 기다리는 태연을
보고만 있었다.
"뭐하고 있어?"
"네? 아, 죄송해요.."
허둥거리며 차에서 내리던 정인이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자 태연은 정인의 팔을 잡고 제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우산속에서 그에게 밀착된채 걸음을 옮기며 정인은 제발 이 미칠듯한 두근거림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감사해요.. "
입구에 서서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네던 정인은 태연의 한쪽 어깨가 완전히 젖어버린걸 보았다. 꽤 커다란 우산이라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을텐데.. 제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느라 다 젖어버린 그의 오른쪽 어깨를 보자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때문에 비 맞으셔서 어떡해요.. "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말고 올라가.."
"먼저 가세요.."
"올라가는거 보고 갈테니까 .."
가슴속에 꾸역꾸역 밀어넣기만 했던 수많은 질문들 가운데 어느 한가지라도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을거란걸 알지만..
망설이던 정인은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돌아서고 말았다.
빗속에 그를 혼자 버려두고 가는것 같아 걸음걸음이 무겁다. 미쳤나보다 유정인.. 누가 누굴 버린다는걸까..
정작 버림받은건 제 마음이면서..
저도 모르게 돌아보게 될까 정인은 꼭 쥐어진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온몸의 감각이 모두 뒤에 남겨두고 온 그에게 집중되어 있어서인지 .. 아니면 생각을 온통 다른데 내어주고 걸어서인지..
계단끝에 무겁게 내딛었던 걸음이 마찰력을 잃어버린채 힘없이 앞으로 밀려버렸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뒤로 기우는 몸을
가누지 못한채 정인은 두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거세게 내리는 비.. 하나뿐인 우산.. 그런 유치하고 치사한 이유를 들어서라도 곁에 붙들어두고 싶은 사람..
입구까지 가는 길이 너무 짧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제 자신이 한심해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하고싶은 말이.. 묻고 싶은 얘기가 많을텐데.. 오는 내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지금 정인이 보고 있는건 젖은 제 어깨였다.
몇번이나 달싹이는 입술이 무슨 말을 먼저 물어올지.. 그녀의 질문에 저는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내심 긴장하고 있던 태연은
결국 모든걸 마음안으로 밀어넣은채 말없이 돌아서는 정인을 손을 뻗어 잡을뻔 했다.
힘들어 하는게 눈에 보이는데도.. 숨기려고 애쓰는 정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럼에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걸 보면 아무래도
저는 용기도 없는 비겁한 놈이 맞는가보다... 아마도 지금 저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돌아서면 정인도.. 저도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울게 분명할테지..
적어도.. 오늘 그녀에게 들켜버린 제 감정에 대해서 만이라도 .. 말해야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거짓으로 둘러대는 변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인은 또다시 제게 등이 떠밀려 끝도 보이지 않는 슬픔속으로 떨어지고 말것이다.
정인을 부르기 위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던 태연은 들고있던 우산을 던져버리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정인의 뒤로 다가간 태연은 한쪽 팔로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는 정인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팔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번쩍 들리다시피 돌려세워진 정인은 꽤나 놀랐는지 잔뜩 경직된채 매달리듯 제 옷깃을 잡았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유정인?"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걸까.. 다급한 부름에도 아무 대답이 없는 정인의 양 어꺠를 잡은 태연은 얼어붙은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괜..찮은..거에요..?"
여전히 제 옷깃을 꼭 붙잡은 정인의 어깨가 잘게 떨려온다.
무얼 말하는거냐고 되묻는건 무의미했다. 그녀는 태연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 괜찮은거냐고..
태연은 떨고있는 정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괜찮아.. "
"그때..일 때문이면.. 그럼 제가.."
"아니.. 그런거 아니야.. 그때 일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 앞으로도 그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거야. 내가.. 내가.. 오늘 너한테
그런 모습을 보였던건.. 그것도 너때문은 아니야.. 나 때문이지.. 그러니까 .."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정인이 어떤식으로 이해하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태연은 그 이상 털어놓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금이나마 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태연은 아직도 가늘게 떨고 있는 정인을 바짝 당겨 안았다.
한동안 그가 하는대로 서늘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울음을 삼키던 정인이 태연의 품안에서 빠져나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요.. 대신.. 혹시라도 힘든일이 생기면..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래.. 약속할게.."
정인을 엘리베이터에 태워 올려보내고..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우산을 들어 빗물을 털어냈다. 제 안에 고인 마음도 이렇게
털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빗속에 우두커니 선채 정인의 집에 불이 켜지는걸 확인하고 차에 탄 태연은 시트 깊숙히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 제 품안에 가득했던 정인의 온기를 떠올리며.. 태연은 그녀를 안았던걸 후회했다..
이제는 정말 보낼 수 없을것 같았다.. 그녀가 원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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