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 정인은 희주가 얘기한 약속장소를 찾느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가로수길이라... 이름이 뭐랬지?.. "
메모해둔 수첩을 찾는데 보이질 않는다.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어, 희주야.
휴대폰 액정에 뜬 진희주라는 이름에 얼른 전화를 받으니 그녀는 다짜고짜 이상한걸 물어온다.
-유정인! 정인아. 너 사귀는 사람 있어?
-뭐? 다짜고짜 사귀는 사람 이라니.. 왜 그러는데?
-아 ! 기지배 그냥 대답이나 해~ 있어 없어?
-어,없어.. 없는데.. 그건 왜 물어?
-OK~ 알았어 접수했다. 그럼 주말에 보자~
뭐라 더 물을 틈도 주지 않은채 희주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야 진희주.. 뜬금없이 막무가내인것도 여전하군...."
그렇게 전화를 끊고 정인은 약속장소를 찾는건 까맣게 잊은채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결국 다음날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약속장소에 대해 떠올린 정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대체 요즘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건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컴퓨터앞에 앉는 정인.
호기심 가득한 동만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 최동만 너 혹시 가로수길 잘 아냐?"
"가로수길이요? 잘 알죠. 알다마다요. 그런데 갑자기 가로수길은 왜요?"
"내일 약속이 있는데 장소가 가로수길 어디라길래..."
정인이 약속장소의 이름을 알려주자 동만은 "아~ 거기요?" 하더니 컴퓨터에서 지도를 열어 약도를 출력해준다.
약도를 받으려고 손을 뻗으니 동만이 잽싸게 종이를 휙~ 빼버린다.
슬쩍 인상을 쓰며 뭐냐고 묻자 동만은 생글거리며 "누구 만나시는데요?" 한다.
"그건 니가 알아서 뭐하는데?"
"혹시... 유검사님 데이트하세요?"
"그래 데이트 한다.! 해! 왜? 나는 남자 좀 만나면 안되냐? 얼른 안내놔?!"
정인이 약도를 뺏다시피 낚아채 가방에 집어넣고는 더이상의 질문은 사절이라는듯 사무실을 나가버린다.
그와 동시에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범. 동만이 쪼르르 달려가 순범의 팔을 잡아끈다.
"뭐야? 너 왜그러냐? 아 이쟈식이 이거 좀 놓고. 뭔데그러냐?"
"유,유검사님이 데,데이트 하신데요!"
순범은 놀라 입을 벌린채 멀뚱멀뚱 동만을 보고 있다.
"황형사님?"
동만이 순범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젓자 그제서야 머리를 흔들며 "너 지금 뭐랬냐?" 하고 되묻는다.
"아이 진짜, 유검사님이! 내일! 가로수길에서! 데이트를 하신댔다니까요!"
또박또박 힘주어 다시 말해주었더니 순범은 동만의 뒤통수를 퍽 때린다.
"아! 아 진짜 왜 때리세요."
"너 인마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거냐? 유검이 뭐, 뭘해? 이 쟈식이 그냥 "
"황형사님 속고만 사셨어요? 방금 ! 유검사님이 가로수길에 브런치로 유명한 카페 이름을 대면서 위치 아냐고
물으시더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약도 출력해 드리면서 혹시 데이트하세요? 했더니!"
"했더니?!"
"왜? 나는 남자 좀 만나면 안되냐?! 하시면서 약도 챙겨서 가방에 넣으시더니 제가 뭐 또 물어보려고 하니까 휙~
나가셨다니까요"
순범이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며 심각한 표정이 된다.
"야 똥만아 민검은? 민검 어딨냐?"
"예? 민검사님은 왜요? 뭐 집무실에 계실걸요? 나가시는거 못봤는데요"
순범은 앞에 선 동만을 홱~ 밀치고는 태연의 집무실로 달려들어간다.
문이 벌컥 열려도 태연은 고개도 들지 않는다.
"야야 민태연! 니가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지난 사건 파일이나 정독하고 있을때가 아니다. 너,너 그러다
닭쫓던 개되게 생겼어 인마!"
그제야 태연은 고개를 들어 순범을 올려다본다.
"유,유,유검 나,나,남자 생긴거 같다. 태연아!"
언제고 웬만해선 흔들림 없던 태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야! 태연아 너 왜 말이 없어 인마!"
"다짜고짜 유정인이 남자가 생겼다니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말하는데?"
순범이 고개를 저으며 끌끌 혀를 찬다.
"또또 이렇게 잘난척 아니지 그 뭐냐 요즘말로 시크한척? 니가 지금 그렇게 느긋하게 얘기할 처지가 아닌건 니가 알고 ,
내가 알고, 하늘이 알아 인마!"
"무슨 일인데 그래?"
'쨔식 궁굼하지? 어디서 이 형님을 속여먹을라고'
순범이 회심의 미소따위를 지으며 한발짝 다가선다.
"너 유검이 쉬는날 뭐하는지 알지?"
"...................."
"아 진짜 얘가 또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유검 관심사가 뭐냐? 시체! 사건! 일! 일! 거기에 민태연! 아니냐. 그러니
누구 닮아서 주말에도 죄 사건파일이나 들여다보고 있지 ! 그런데! 그런 유검이 요즘 데이트코스로 각광받는다는 그
가로수길인지 뭐신지 거기서도 유명한 브런치카페인가 아점카페인가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이거다!"
슬쩍 집중해서 듣는듯 하던 태연이 두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그게 대체 뭐가 어쨌냐는 듯..
"어허~ 너 아직 위기의식 같은게 안느껴지냐? 큰일났네. 쯔쯧.. 이러다 정말 놓치게 생겼어.. 아! 동만이가 데이트 있냐고
물었더니 순순히 그렇다고 했단다. 정말 누가 있는게 아니면 유검이 농담이라도 그런말 막 하고 그러는 사람 아닌거 나보다
니가 더 잘알지않냐? 아직도 느긋하냐? 에라이~ 답답아! 나도 모르겠다. 나는 할만큼 했고! 알려줄만큼 알려줬으니까
나중에 원망하지는 마라!"
순범이 답답하다는듯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고는 휙 나가버린다.
사실 슬쩍 신경이 쓰이는건 사실이다. 왜 안그렇겠는가.. 받아주지는 못했어도.. 그녀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 이미
한참전에 알고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믿고 싶지 않다. 정인이 그렇게 쉽게 제게서 등을 돌릴거라고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태연이 자리에서 일어서 블라인드 너머 비어있는 정인의 자리를 보며 한숨 짓는다.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태연은 그대로 돌아서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간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인에게 전화를 건다.
-어디야?
-네? 저,저요?
-어디있냐구
-오,옥상이요.. 왜그러세요? 사건 터졌어요?
-거기 있어
태연은 전화를 끊고 아까부터 1층에 멈춘채 올라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노려보다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긴다.
정인은 끊어진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러시지?.. 여기.. 있으라구?.. "
다시한번 '거기 있어' 하던 태연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짧은 순간 정인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가 여기로 온다는걸까?.. 나보고 기다리라는걸까?.. 아니면.. 내려가야할까?
정인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옥상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출입구의 손잡이를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문이 홱 열리고.. 태연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다.
"민검사님.. "
태연은 아무말 없이 정인의 손목을 잡고 옥상 난간쪽으로 이끈다.
놀란 정인은 어찌해야할지 몰라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그가 이끄는대로 따라간다.
꽤 자주 이곳에 올라와 복잡한 도심의 모습을 눈에 담곤 하던 태연을 따라.. 어느새 정인도 그만큼 자주
옥상을 찾곤 했고... 가끔은 함께이기도 했다..
마치 자리를 정해놓기라도 한듯 늘 태연의 왼편에 정인이 서곤 했다.
지금도.. 태연의 왼편에 선 정인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다.
마음같아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대체 내일 가로수길에서 누굴 만나는건지 묻고 싶다.
그녀의 마음이 더는 제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 만약..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를 그녀가 사랑하고 있다면...
어떤사람인지 알고 싶어진다. 뜨거운 무언가가 심장을 옥죄듯.. 가슴이 뜨끈하고 답답해진다.
하지만.. 태연은 아무것도 묻지 못한다.
말간 눈으로 제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인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쯤이면 그녀의 손목을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태연은 그러지 않았다.
"왜 여기 올라와 있어?"
"네? 아... 그냥.. 잠깐 머리 좀 식힐겸..."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정인의 눈빛에 당혹감이 묻어난다.
"힘든일이라도 있어? "
다정한 물음에 그제야 정인이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없어요.. 아무일도.. "
"그럼 됐고.. 힘든일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말고 얘기해"
"네.."
생긋 웃으며 올려다보는 정인의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하마터면 품안으로 당겨 안을뻔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고.. 저 보드라운 볼을 어루만지고 입맞추고 싶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태연은 정인의 손목을 놓아준다.
"내려가지.."
분명.. 제가 정인에게 혼란을 더해주고 있었음에도.. 정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것이.. 더더욱..
그녀에게 누군가 생겼다 하더라도 저는 질투따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것 같다.
쓰디쓴 무언가를 삼킨듯.. 입안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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